지학순을 만나러 원주에 가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3월 12일은 지학순 원주교구 초대 주교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되는 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선봉이자 정신적 지주로 기억하고, 어떤 이는 1985년 이산가족 상봉에서 누이를 만난 모습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학순 주교는 이런 평면적인 인상으로 기억될 인물이 아니다.

지학순 주교는 1921년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청학리(현 황해북도 중화군 중화읍)에서 태어나 1934년 1월 25일에 중화천주교회에서 메리놀선교회 소속 요셉 클먼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소신학교인 서울 동성고등학교를 다녔다. 1948년 3월 함경남도에 있는 덕원신학교를 다니다가, 1950년 1월 17일 남북 분단 후 친구인 윤공희 (훗날의 광주 대교구 대주교)와 함께 월남하여 서울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편입했다. 남한으로 탈출하던 중 체포되어 황해도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가족들은 그대로 북한에 남아 있었다.

지 주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1952년 2월 제대해 가톨릭 신학대학에 복학했다. 1952년 12월 15일 피난지인 부산 대청동 성당에서 서울대교구 노기남 대주교에게 사제서품을 받았다. 거제포로수용소 종군신부, 부산과 청주 등에서 본당 신부로 있다가 로마 우르바노신학교에 유학하여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계를 바꾼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났던 1965년 원주교구가 서울대교구로 부터 분리되어 창설되면서 주교 서품을 받고 천주교 원주교구의 초대 교구장이 되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요즘 협동조합운동이 활발한데, 놀랍게도 지 주교는 50년 전에 이 운동을 지방 소도시에 불과한 원주에서 시작했다. 많은 조합들이 생겨났고 뜻있는 원주 시민들이 지 주교 주변에 모여들었다. 모든 자리가 ‘임명’되던 시절, 이 조합들은 민주적 투표로 대표가 선출되는 전국에서 거의 유일한 조직이었다. 지 주교는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1968년, 서울에도 없는 가톨릭센터를 원주에 지었다. 여담이지만 이 건물은 당시 원주에서 민간에서는 유일하게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했는데, 휴지가 자주 없어졌다. 하지만 괘념치 않고 계속 휴지를 달았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건물 축성을 위해 원주를 방문한 김수환 서울대주교조차 어떻게 운영할 것이냐며 ‘걱정’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가톨릭센터는 원주 지역사회 문화 활동의 전당으로 자리 잡고 나중에는 김지하 등 의식 있는 청년들이 모여드는 지역 민주화운동의 본부가 되었다.  


1970년, 516재단은 원주문화방송 설립을 추진하면서, 원주에 이렇다 할 기업이 없는 관계로 지역에서 인적 네트워크가 강한 원주교구에 제휴를 요청했다. 방송을 통한 복음 전파와 지역사회 언론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원주교구는 40% 지분을 투자하였다. 원주문화방송은 당시 가톨릭센터 내에 있었다. 그러나 지 주교가 아시아 주교회의에 참석하면서 매스컴을 담당하는 외국신부를 통해 방송장비의 가격을 알게 되었고 귀국하여 조사해보니 많은 부정과 비리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시정을 요구했지만 516재단은 권력만 믿고 반년이 넘도록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지 주교는 1971년 9월 20일, 교구 성직자와 평신도 대표를 모아 연석회의를 열고 교구의 투자액이 문제가 아니라 권력에 의지한 제도화된 부정이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10월 5일, 원주시 원동 주교좌성당에서 ‘사회정의 구현과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3일에 걸쳐 교구 내 사제, 수도자, 평신도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었다. 이 사건은 한국 천주교회가 처음으로 주교의 지도아래 공개적, 대중적으로 사회악과 부정부패에 저항하고 나선 큰 사건이기도 하지만 학생운동을 제외한 시민사회에서 첫번째로 가두시위에 나선 기념비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그의 반유신 민주화운동은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 아니라 꾸준한 사회활동 속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시야를 인권문제로 돌리게 된 그는 1972년 9월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회 이사장으로 추대되었고 10월에는 가톨릭노동청년회, 평신도사도직전국협의회,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가톨릭여성연합회 총재주교를 맡아 교회 안팎에서 힘없고 억눌린 자들의 인권옹호에 나섰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지 주교의 ‘해임’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교회 제도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추기경이란 교황 선거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는 자리일 뿐, 주교의 임면은 교황의 권한인데 추기경이 ‘높으니’ 지 주교를 해임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인데, 김 추기경이 이 사실을 지적하자 얼굴을 붉혔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에도 지 주교는 유신정권을 계속 비판하였는데, 결국 1974년 7월 6일 아시아 주교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김포공항에서 중앙정보부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7월 10일 ‘정의의 실천은 주교들의 의무’라는 성명으로 지지를 표시했다. 다음날 석방되어 명동 성당 옆의 샤르트르 수녀원에 연금되었으나 7월 23일 “유신헌법은 진리에 반대되고,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여 자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며, 공판을 위해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출두할 수 없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내외신 기자 앞에서 발표하여 전국을 뒤흔들었다. 이 때문에 다시 체포되어 8월 9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주교의 체포와 투옥은 한국 천주교가 집단적으로 정의구현 활동에 나서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74년 9월 24일, 300여 명의 신부들이 원동성당에 모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출범시켰다. 이 날 저녁 사제, 수도자, 교우 등 1,500여 명이 모여 기도회를 열고 가두시위를 시도했다. 경찰들의 저지로 300m 진출에 그쳤지만 성직자 시위의 파급은 매우 컸다. 이는 또한 10월 9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학에서 전국에서 몰려온 500여 명의 성직자와 2만여 명의 교우들이 ‘화해와 쇄신을 위한 가톨릭 전국 성년대회’로 이어져 신자들 5천여 명이 혜화동 로터리에 진출해 경찰과 대치하였다. 이런 내외의 많은 노력으로 지 주교는 226일 동안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75년 2월 18일 석방되었다. 이때 김수환 추기경과 사제단은 직접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 그를 맞이하였다. 


지 주교가 원주역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3만여 명의 원주시민이 오후 1시부터 기다렸다. 당시 원주 인구가 10만여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정말 많은 시민이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도 원주에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2시 10분, 지 주교가 탄 승용차가 원주역전에 이르자 진광중고등학교 밴드가 ‘고향의 봄’을 연주했고 교우들과 시민들은 ‘지 주교 만세’를 부르며 열렬히 환영했다. 옛 강원감영까지 이르자 청년들은 웃옷을 벗어 길에 깔았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지 주교는 연도의 교우와 시민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답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실을 알고 자신의 은전으로 풀려났는데 개선장군 대접을 한다고 무척 불쾌해 했다고 한다.

석방 이후에도 지 주교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지주로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또한 교회 일치 운동 단체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인권옹호에 적극 나섰다.

1985년 남북한 정부의 합의에 따른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북한을 방문하여 35년 만에 누이동생 지용화를 만났으며, 분단 40년 만에 북한에서 한국인 천주교 사제로서는 처음으로 미사를 드렸다. 1988년에는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를 설립했고, 1991년에는 남북한장애인걷기운동본부장을 맡는 등 사회복지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가난하고 작은 원주교구 안에 지금도 64개나 되는 복지시설을 유지하고 있다. 원동성당은 그 후 최기식 신부를 주임으로 맞이하였고 최 신부는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관련자를 잠시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구속되기도 했다.

1993년 3월 12일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되어 선종하였으며, 유해는 원주교구 관할의 제천 배론성지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두 달 전 제천 유세에 나선 박근혜 후보가 들러 참배하기도 했다.

선종 후 그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사)지학순정의평화기금’을 설립하고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제정하였다. 4주기 추모미사와 함께 제1회 정의평화상이 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 주어졌으며, 작년에는 캄보디아 지뢰금지운동이, 올해에는 인도네시아 서파푸아의 분쟁을 해결을 위해 대화를 중재한 넬레스 테베이 신부가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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