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사람들은 천막 생활을 하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84년 8월 27일, 1차 아파트 분양 가격에 당황한 주민들이 구청장에게도 무시당하자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해 시장을 만나기로 나선다.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수가 1,000여 명. 그들은 김포가도를 거쳐 양화대교까지 몰려갔다. 하지만 어느새 출동한 전투경찰의 제지로 그 자리에서 연좌 농성이 되어 버렸다. 이로 인해 밤늦게까지 김포 진입로는 전면 차단됐고 성산대교 일대는 교통이 완전히 마비되는 등 일대 혼잡을 빚었다.



경찰이 시위 참가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한 할머니가 얼굴에 최루탄을 맞고 실신했고 다수의 부녀자들이 폭행당했으며 100여 명의 주민들이 연행됐다.

이에 굴하지 않고 주민들은 밤늦게까지 연행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오목교에서 목동 거리 쪽으로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으나 이번에는 400여 명의 주민들이 경찰의 무차별 구타로 연행됐다. 이 날 이후 뚝방 100여 미터 가량 경찰 차량이 배치됐고 목동 아파트의 분양 일정이 확정되면서 투기꾼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의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는 목동의 실상을 조사하여 시민들에게 알렸고 서울대, 이화여대 등에서는 양화교 시위의 경과와 동기를 학보에 실어 이 문제를 학내에 알려 나갔다.
10월 말, 1통부터 14통까지 철거되고 날씨까지 추워지자 갈 곳 없는 주민들은 더욱 다급해졌다. 11월에는 주민들이 오목교까지 나가 ‘아파트 입주권을 세입자에게도 혜택을 달라’, ‘우리는 갈 곳이 없다 대책을 세워 달라’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던 중 경찰과 구청 직원들에게 폭행당하거나 연행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에 12월 18일 주민 500여 명은 뚝방에 모여 대책 회의를 한 후 경인고속도로를 점거한 채 생존권 보장을 울부짖었으나 전경 부대들은 폭력적으로 진압한 후 23명을 구로 경찰서에 연행해갔다.
그러나 주민들은 지치지 않고 싸웠다. 스스로를 지키고 어린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단결해서 투쟁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옥주 300여 명이 시청 앞 광장에서 농성을 하는가 하면 구청, 목동 개발사업소, 파출소, 김대중 씨 귀국 환영회 등 여론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단결된 목소리를 외쳤다. 여의도 신민당사를 점거해서 5일 동안 단식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누구를 위한 도시개발인가?
당시 신학생으로 목동에서 도시빈민운동에 참가했던 박병구(46) 씨는 목동 철거민 투쟁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80년대 초에는 학생운동의 시위도 상당히 제한적이었고 민중운동 차원에서는 목동 주민들이 처음으로 집단 행동을 한 거였어요. 구호 속에 ‘주민의 생존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군사정권은 물러가라’라든가, ‘대한민국 국민임을 포기하겠다’라는 결의가 있었을 만큼 생존권을 넘어 정치적인 부분까지 언급했었죠.”

84년 10월 29일, CBS 라디오의 ‘다시 어디로 가야 하나’란 프로그램에선 당시 목동 주민들의 말을 그대로 보도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스스로를 단련하고 조직하는 사람들
목동 싸움은 장장 3년을 끌었다. 주민들 또한 싸움을 통해 단련됐다. 내부적으로 철야 경비조와 지역 대기조를 만들어 공권력을 견제했고 주민 스스로 회장, 부회장, 총무, 각 통·반장으로 조직체계를 구성한 뒤에 민주적인 운영을 통해 각종 투쟁을 진행했다.
결국 가옥주건 세입자건 대책이 전혀 없었던 목동 공영개발사업에서 철거민의 투쟁으로 가옥주들은 최초로 무허가 주택의 재산권을 인정받았고 세입자들은 10평의 임대아파트 입주권과 가장 저렴한 이자로 이주비용을 융자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외부 복도를 통해 한 층이 다 연결되어 있고 중앙의 광장을 향해 문이 나 있어 언뜻 보기에도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려 한 건축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복도에는 안에 들어가지 못한 건조대의 빨래들, 낡은 냉장고와 세탁기, 아이들 자전거, 쓰레기 묶음 등이 나와 있어 여전히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를 짐작케 했다. 현재 50세대만 초기 이주 세대이고 나머지는 그 후 새로 들어온 입주자들이다. 이들이 정착하기까지는 고 제정구 선생과 정일우 신부의 도움이 컸다.

“이 땅도 정일우 신부가 독일에서 돈을 얻어서 산거예요. 정부에서 해 준 거 뭐 없어요. 융자할 때 이자 6% 해주기로 해놓고 말을 바꿔서 기어이 10% 받아갔어요. 20년 거치인데 지금까지도 붓고 있어요. 생활이 어려워 밀리면서 붓다 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