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2년 11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60 평생을 인쇄장이로 살다간 세진인쇄 사장 강은기 씨는 한국민주통일연합의 기관지인 『민족시보』 관련으로 중앙정보부에서 10일 동안 조사받은 것을 시작으로 안 가 본 경찰서가 없을 만큼 을지로에서는 감시 대상 0순위의 인쇄업자였다. 1970~80년대의 굵직굵직한 투쟁 현장에는 어김없이 그가 만든 유인물이 뿌려졌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등의 재야단체 기관지 역시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으니, 불온 유인물이 제작될 때마다 경찰은 당연지사로 세진인쇄부터 들이닥쳤다.

심지어는 다른 인쇄소의 직원이 끌려가도 ‘세진’이라는 이름을 둘러대는 통에 덤터기를 써야 했고, 1980년에는 <김재규 항소 이유서>를 제작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기까지 했다.
  


그렇게 숱한 곤욕을 치렀으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의 열망과 결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늘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1987년 6월항쟁을 맞았고, 1987년을 전후로 많은 운동권 젊은이들이 인쇄를 배우기 위해 을지로에 찾아들었다. 강은기 씨는 그것을 계기로 1988년에 24명의 인쇄인들과 함께 인쇄문화운동협의회(인문협)를 발족시키기에 이르렀다. 반정부 유인물을 찍어낼 때마다 연행되거나 구류를 살던 인쇄인들이 이제는 서로 연대해서 함께 맞서자는 것이 설립 취지였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으로 민주화 운동이 변화의 급물살을 타면서 인문협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합법적인 대중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이 대안으로 모색되면서 인문협의 구성원들은 저마다 활로를 모색하느라 뿔뿔이 흩어졌고, 세진인쇄를 찾는 발길도 점점 줄어들었다. 강은기 씨가 세상을 뜨고 난 뒤, 세진인쇄는 1977년도부터 함께 일을 한 동생 강은식 씨가 맡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대동인쇄 직원이었던 안삼화 씨와 권순갑 씨를 비롯해 한인철, 구기엽, 김복동, 윤문희, 정정용, 최경자 씨 등 대동인쇄 식구로 통했던 인쇄인들은 20여 명 가까이 되었다. 그 중 그때부터 지금까지 을지로에서 동광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는 김복동 씨, 대흥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는 윤문희 씨 등 몇 사람 외에는 뿔뿔이 흩어져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1985년 5·3인천항쟁 관련 유인물을 찍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동인쇄는 결국 2년 남짓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당시 편집을 담당했던 안삼화 씨와 경리를 맡으며 맏언니 역할을 했던 권순갑 씨가 보안사로 끌려가 일주일 넘게 고문을 당했고, 그 사이에 사장 윤여연 씨가 민청련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다 수배를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안사에서 풀려난 뒤로도 일년을 더 숨어 산 권순갑 씨는 아직도 고문당하던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등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한다.

이렇게 해서 대동인쇄는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지만, 윤여연 씨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점 조직망의 시스템을 다시 이용해 1987년 6월항쟁과 KAL기 폭파사건 관련 유인물을 많게는 5백만 장까지 인쇄해 시위 현장에 뿌렸다.

  
“<모이자 시청으로>라는 유인물이었죠. 들킬까 봐 무섭기도 했지만, 서울 시내를 뒤덮은 군중들을 보면서 인쇄를 통해 운동을 하겠다던 그 동안의 노력과 시련이 드디어 열매를 맺는구나 싶어 감격스러웠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유인물들을 한 장씩이라도 남겨두지 못한 것이 참 후회스러워요. 물론 그 시절에야 어디 무서워서 따로 보관할 생각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지만, 그게 다 사료인데 말이에요.”
그렇게 명맥을 유지하던 대동인쇄는 1991년 을지로에서 완전히 간판을 내리게 되었다.

인쇄인들의 역할
1년 전에 옛 인쇄골목에서 원통골목으로 이사한 대흥인쇄소에는 20년 전에 대량 유인물이 가능케 했던 귀한 인쇄기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당 1만 장 이상을 찍어내던 마스터기와 오프셋기가 그것인데, 중간에 폐기처분될 위기까지 맞았으나 용케 잘 넘기고 앞으로도 10년은 거뜬히 견딜 수 있을 것처럼 의연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인쇄물을 압수당하기도 여러 차례 겪었고, 서너 번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한 윤문희(57) 씨는 다 대동인쇄가 있었으니 그런 일을 하게 된 것이라며 자신은 언론에 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겸손해 했다.

“나는 생업에 종사했을 뿐이지 뭐. 끌려가더라도 먹고살라니 별 수 있냐고 하면 3, 4일 만에 풀어주고 그랬어요.”
위험수당을 얹어서 받긴 했어도 잘못 하다가는 목숨까지 왔다갔다하는 위험한 시대 상황인데, 선뜻 일을 맡기란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시대로 봐서는 많은 사람들한테 알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했죠. 내가 배운 게 인쇄고 그걸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했어요. 특히 잊을 수 없는 게 박종철 사체 사진인데, 세상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싶었어요. 그걸 전국에 뿌리려고 칼라로 찍고 있으면 머리가……. 어휴! 광주학살 사진도 그랬고…….
 
류외향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1996년 대구 매일신문으로 등단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가 있음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에서 활동
 
사진 황석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