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또 5월이다. 시간은 흘러가 버리지만 반복적인 절기와 날짜가 옛일을 기억케 하고 그 의미를 반추하게 만든다. 한국 사람이라면 비단 광주 시민이나 무슨 대단한 민주투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80년 5월을 어찌 무감하게 회상할 수 있을까?
역사에 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한 도시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만행이 두고두고 가슴 아플수록 그 직전 서울의 봄에 벌어진 반군부 민주화투쟁에 대한 여러 가지 상념을 떨칠 수 없다.
 
서울역 광장의 함성
때는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무려 십여 만 명의 학생들이 모여 ‘전두환 퇴진하라!’, ‘비상계엄령 해제하라!’, ‘이원집정부제 철회하라!’를 목이 터져라 외쳐대고 있었다. 여기에 수십만의 시민들까지 가세해 광장은 물론 인근의 차도와 인도, 고가도로까지 사람들로 넘실거렸다. 18년 간의 군부독재 속에서 억눌려왔던 민중들의 민주화 열망이 폭발되는 순간이었다.

“감격 그 자체였죠. 민주화의 열기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요. 곳곳에서 자유롭게 메가폰으로 연설하거나 구호를 외쳐댔고 기쁜 마음에 서로 부등켜 안은 채 웃고 울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학교에서 서울역까지 오는 동안 시민들도 박수를 쳐주고 물을 떠다 주는가 하면 따라서 행진하는 등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었어요. 고가에 올라가서 보니까 거리가 온통 인파로 둘러싸인 거예요.”

당시 총학생회 간부로 시위에 참가했던 이경재(고려대 행정학과, 77학번) 씨는 현장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다소 격앙된 어조로 상황을 들려 주었다. 말이 ‘수십만 인파’이지 특정한 대회를 제외하고 만 명 이상 조직된 정치집회 구경하기가 흔치 않은 요즘으로선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장면인가!

수십만 민중의 함성과 민주화 열기로 서울의 봄을 한껏 달구었다던 그 광장. 25년의 세월이 지난 그곳은 많이 변해 있었다. 어느새 유럽풍의 낡은 역 건물은 문이 닫혔고 옆에 현대적 감각의 신 역사가 세워져 최상의 서비스로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바람 부는 봄 날 오후에 차들은 고층 건물 숲을 무심하게 씽씽 달렸고 분주한 발걸음으로 광장을 가로지르는 행인들은 누구 하나 과거의 함성과 감동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5월 들어 학생운동 지도부는 투쟁의 목표가 병영집체거부 등 학내민주화 차원에서 ‘계엄령 해제’와 ‘신군부 퇴진’이라는 정치투쟁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투쟁 방식에 대해서 두 가지의 엇갈린 정세 판단이 있었다.

지도부 중 주로 복학생 그룹은 학내 분위기가 무르익은 이 시기에 가두로 진출해서 안개정국을 학생들의 힘으로 민주화시키자는 것이었고 재학생 그룹은 군부가 개입할 빌미를 주어선 안되고 보다 대중적인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봤다. 서울대 등 26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의 공식적인 입장은 ‘비폭력 교내시위’ 원칙을 고수하고 즉각적인 가두진출을 자제한다는 것이었다.
 

나가자, 거리로! 거리로!
하지만 교내 시위와 철야 농성이 계속될수록 학생들 사이에서는 군부 쿠데타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가두진출을 시도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커지고 있었다.

“고려대 총학생회는 5월 축제를 준비하면서 학내에서 기다리자는 입장이었는데 복학생협의회에서는 당장 나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어요. 결국 학생 대중들의 의견이 가두로 진출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져 점차 총학생회도 인식 전환을 하게 됐지요.” 이경재 씨의 말이다.
이러한 가운데 5월 10일, 신민당과 공화당은 총무회담을 통해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를 건의하기로 했으나 전두환 일당은 북한 게릴라 침투의 위협이 높다는 이유를 들어 개헌공청회를 취소하고 전 군과 경찰에 비상경계체제에 돌입할 것을 명령했다.
5월 12일에는 서울 시내에 병력 배치가 시작됐고 이 소식을 접한 대부분 대학에서는 총학생회 간부들이 농성하는 학생들을 귀가시킨 후 자신들도 피신했다. 단지 고려대와 건국대 등 일부 대학만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더 이상 학생회의 결정을 믿지 못한 일부 학생들이 독자적인 가두 진출을 시도했다. 즉 13일 밤, 연세대 복학생 그룹을 주축으로 서울 시내 6개 대학 2천 5백여 명이 광화문으로 나와 가두 시위를 벌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총학생회장단은 학생 대중들의 뜻을 받아들여 14일 오전부터 전면적인 가두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고 그에 따라 7만여 명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 나왔다. 경찰들은 곤봉과 최루탄으로 시위대를 저지했으나 수적으로나 기세로나 우월했던 학생들은 경찰 저지선을 쉽사리 깨뜨리고 광화문을 향해 돌진했다. 이 날 시위는 오후 내내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계속됐고 시청 앞 광장에서 1만여 명이 애국가를 부르고 마무리 되었다.

다음날인 5월 15일에는 10여 만 명의 학생들이 서울역에 모였고 지방에 있는 대학에서도 동시에 가두 시위에 나섰다. 서울역에 모인 학생들은 연좌농성을 벌이면서 전두환 일당과 최규하 정부를 규탄했다. 숭례문 근처에서는 청와대로 진출하려는 학생들과 경찰들 간에 치열한 투석전이 벌어졌고 서울역 광장 곳곳에는 시국에 관한 연설과 구호와 함성이 울려 퍼졌다.


천추의 한, ‘서울역 회군’
총학생회장단은 광장 한쪽에 세워진 통학버스 하나를 임시 회의처로 삼고 향후 대책에 관한 논의를 거듭한 결과 ‘시민의 호응이 적은 상태에서 심야에 군부대와 충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시위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청와대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의견에서부터 아니다, 준비가 아직 안됐으니 여의도로 가서 국회를 압박하자는 의견까지 다양했지요. 하지만 유혈이 예측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단 각 대학으로 돌아가서 사회 전반의 민주세력과 연대해서 전 민중적인 투쟁을 만들어 다시 나오자는 결정을 내리게 된 거죠.”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라 일컬어지는 복귀 결정을 설명하며 이경재 씨는 잠깐 착잡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과오였죠. 당시 결정의 주체로서 서울역 회군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10년 정도 지체됐다는 자책을 오랫동안 했어요. 하지만 그 현장은 일사분란하게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총학생회 결정이 절대적일 수도 없는 분위기였어요. 그 결정에 승복했다는 것은 대중적인 인식 수준이 그 정도였다는 의미 아닐까요?”

현장에 있었던 또 한 사람인 이원주 씨도 70년대 학생운동의 숨은 주역으로서 일반적인 ‘서울역 회군’ 평가에 대해 서운함을 표했다.
“서울역 회군 사건으로 운동권 후배들이 70년대 학생운동 지도부를 싸잡아서 매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봐요. 회군 자체야 물론 잘못됐지. 철야해서 남았어야지. 하지만 당시 지도부의 전략적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봐요. 학생 대중들은 준비되어서 나온 게 아니었거든. 학생회장단도 그 대중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각 대학으로 돌아갔다가 내일 다시 나오자는 결정 하나 내렸을 따름이죠. 잘못된 것은 복학생, 학생회, 지하조직 대표들이 그곳에서 재빨리 임시 지휘부를 꾸리지 못한 점이야. 뼈아프게 말하자면 그 당시 어떤 사람도 서울역 광장에서는 10만 명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어요.”

관련 탐방지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