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명동, 그러나 그 모습 그대로인 ‘답동성당’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지난 6월 3일, 인천 주교좌 성당인 답동성당에서 인천교구 6월민주항쟁 30주년 기념 표석 축복식이 있었다. 축복식을 주재한 인물은 김병상 몬시뇰 이었다. 그는 이미 6월항쟁 10년 전인 1977년, 이곳에서 열린 ‘정의구현을 위한 특별기도회’ 때 ‘유신헌법 철폐’ 현수막을 걸었다는 이유로 구속된 ‘경력’이 있다.


인천 답동성당

그러면 30년 전, 이 성당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운명의 1987년 6월 10일, 답동성당과 부속건물인 가톨릭회관에서는 오후 4시 20분부터 10분 간격으로 국민대회 참가를 촉구하는 가두방송을 내보냈다. 인천의 7개 사회단체로 구성된 ‘호헌분쇄 및 민주개헌을 위한 인천지역공동대책위원회’가 6.10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 개최를 인천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인천광역시와 경기도 부천, 김포, 시흥시와 안산시 일부를 관할하는 인천 교구는 1889년 7월 1일, 인천 성당(현 답동성당)이 창설되어 초대 주임으로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선교사인 니콜라 빌렘 신부가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 빌렘 신부는 이듬해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 3,212평을 매입하였고, 1893년에 부임한 마라발 신부가 2년 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1897년 7월 4일에 300평 규모에 3개의 종탑을 전면에 세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 완공되었다. 1933년 신자수가 1,500여명에 육박하게 되자 증축계획을 세우고 1935년부터 성전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개축작업을 시작하여 2년 후인 1937년에 성대한 축성식이 열렸다. 웅장한 자태로 인천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현재 모습의 답동성당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에 사적 287호로 지정되었다.

인천지역 가톨릭은 1950년 후반부터 서울로부터의 독립을 시작했고, 미국의 메리뇰회가 사목을 인수 받았다. 3A(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뉴욕 주에서 창립된 이 수도회는 ‘가톨릭 교회의 선원들’이라고 불렸다. 이 수도회는 어려운 지역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의료와 교육혜택을 베풀고, 공동체를 건설하고, 사회정의의 증진에 노력했다. 그리고 1950년 중반부터 해방신학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1960년 8월 29일, 메리뇰회 소속 신부로 인천항에 발을 디딘 인물이 바로 인혁당 희생자의 영원한 친구 제임스 시노트 였다. 그는 바로 서울로 가서 8개월 간 한국어 교육을 받고 다음 해 5월 13일 답동성당에 파견되었다. 3일 후에는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리고 메리놀회의 나길모 (본명은 윌리엄 존 맥너튼) 신부가 다음 달 6일 초대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62년 3월 10일 교황청이 한국교회의 교계제도를 인준하며 정식으로 인천교구로 승격되었다. 나길모 주교는 인천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공교롭게도 나 주교와 시노트 신부, 그리고 인천교구 소속은 아니지만 한국 빈민 운동에 큰 공헌을 한 정일우(존 데일리) 신부는 모두 아일랜드 계열 미국인 이었다. 아일랜드 인들은 영국의 혹독한 압제와 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기반을 쌓았고 미국 가톨릭의 기둥이 되었다. 이런 고난의 역사를 가진 아일랜드 인이었기에 한국의 아픔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일랜드계는 아니지만 1967년 심도직물 노동자들을 도왔던 전 미카엘(미국명 마이클 브랜스필스) 신부도 메리뇰회 소속이었다. 1968년 시노트 신부는 나 주교의 방침으로 실시한 투표로 부주교가 되었다. 물론 신부들만을 대상으로 한 투표였지만 그냥 주교가 임명할 수 있음에도 이런 투표를 한 이유는 인천교구와 메리뇰 회의 성향을 짐작하게 하는 일화이다.

1987년 6월, 인천의 인구는 지금의 절반 정도인 140만 명. 항구 주변에 동일방직을 비롯한 대규모 공장이 밀집해있었고, 주안과 부평공단을 중심으로 약 40만 명의 노동자가 살고 있었다. 따라서 인천 지역의 6월항쟁은 노동자들의 비중이 컸다. 물론 인하대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 시장 상인들, 신부와 목사, 스님 등 종교인, 의사와 변호사, 교수 등 전문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과 계층이 참여하였고, 장소 역시 동인천역이나 부평역 광장, 성당과 교회, 대학 등 ‘전통적’인 시위 장소부터 공단과 시장 앞, 심지어 철마산줄기를 넘어 파출소를 공격하는 등 거의 인천 시내 전부가 시위장이 되었다.


박종철군을 위한 추도식 및 기도회 @openarchives

이런 투쟁의 에너지를 제공한 중심지는 누가 뭐래도 답동성당과 가톨릭회관이었다. 이미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열사가 고문사 당했을 때 인천 교구는 <인천주보>에 열사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을 실었고, 1월 26일 오후 7시에 답동, 부평1동, 소사성당에서 추모미사를 봉헌했다. 인천교구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중대한 국가범죄로 인식하고 지역별 미사를 동시에 봉헌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2월 7일에는 서울 등 전국 16개 지역에서 고 박종철 국민추도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무산되자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인천 교구는 오후 2시부터 가톨릭회관 6층에서 사제단 명의로 약 1시간 40분 동안 옥외방송을 통해 인천 추도회를 개최했다. 4월 13일 전두환이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4월 30일, 천주교 인천교구 사제 39명이 민주개헌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가톨릭회관에서 단식기도에 들어가 5월 6일까지 농성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렇게 명실상부하게 인천 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답동성당.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런 과거가 있었는지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평화롭다. 따지고 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대학생들과 종교 조직에 기댔던 노동운동, 빈민운동, 시민운동이 자체 역량을 쌓아 자립한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메리뇰회의 미국인 신부들이 이끌던 인천교구 역시 한국화 된지 오래다.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답동성당에서 그 때 그들이 했던 헌신과 용기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최근 ‘상업화’된 명동성당의 그 언덕과는 달리 그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답동 성당과 인천 가톨릭회관은 그래서 더욱 가치가 있다.


인천 답동성당에서 열린 `언론왜곡보도 및 노동자폭력탄압규탄 인천시민대회` 광경 @open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