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민주화가 필요한 곳  : 서초동 법원단지를 가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너무 광범위한 주제라 짧게 정리하기 쉽지 않지만 적어도 민주국가의 설립 조건 중 가장 중요한 요소가 정당한 법 절차를 통한 ‘사법 체계’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입법, 사법, 행정 삼권의 분리가 민주주의 국가라면 금과옥조로 여기는 ‘절대 조건’ 임을 ‘교과서’적으로 배웠다.

하지만 ‘민주공화국’ 인 대한민국에서 그 체제가 실제로 그렇게 작동해 왔느냐고 묻는다면 동의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형사재판에서 기소를 독점하는 검찰은 물론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조차 정치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수많은 민주 인사들을 감옥에 가두고 심지어 사형선고를 내려 집행하기 까지 한 만행이 한국현대사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현직 검사장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고, 엘리트 검찰 출신 청와대 수석의 스캔들이 한 달 이상 정국을 뒤흔들고 있다. 이렇게 되자 공수처 신설이 다시 유력하게 떠오를 정도로 검찰 개혁이 시대적 요구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정도만 다를 뿐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불신도 대단하고 ‘몇 몇 고위직 판사’ 들도 이런저런 사고를 치고 있다. 행정부와 입법부와는 달리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자 ‘사법고시’라는 과정을 거친 엘리트들의 집단인 검찰과 사법부의 아성인 서초동 법조단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지 않을까? 물론 그들이 민주화 운동 사건에 대해 어떤 판결을 내렸으며 권력의 요구에 의해 어떤 수사를 했는지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1970년대 유신정권은 강남 개발을 시작하면서 서울시청을 비롯한 112개 정부기관을 모두 옮기려 했지만 중앙부서와 언론의 냉담한 반응과 비용 문제 등으로 취소되었다. 그럼에도 많은 정부 기관과 공공 기관이 강남으로 이전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삼부(三府)의 하나인 사법부와 최고의 실세기관 검찰청이었다. 이 기관들은 1990년대 중반까지 차례로 서초동으로 이전했다. 사실 이 땅은 서울시가 1979년에 이곳으로 시청사를 이전하기 위해 사들인 2만 5천 평의 부지로, 대통령의 결재가 나지 않아 미루어지다가 결국 시청사 이전 건은 백지화되었다. 결국 대법원과 검찰청이 이곳으로 가게 되었고, 대신 두 기관은 중구 정동의 옛 청사와 부지를 서울시에 내어주고 이 땅을 받았다. 대법원 청사는 서울시의 미술관이 되었고, 대검찰청사는 서소문 별관으로 변신한지 오래되었다.

교대역 쪽으로 떨어져 있는 서울 법원 종합청사는 대법원처럼 석조로 짓지는 않았지만 일반인들은 정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꽤 높은 계단을 지나야 하고, VIP들은 자동차로 직접 정문으로 갈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청사임에는 틀림없다. 누군가는 기요틴을 연상하게 한다고 하는데 약간 지나친 표현일지라도 일반 시민들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디자인이라는 지적에는 거의 모두 동의할 것이다. 검찰청 청사는 짙은 색으로 덮여 있어 밖에서 안을 알 수 없는 철옹성 같은 느낌을 준다. 어찌 보면 수사기관에 어울리는, 그리고 그들의 ‘마인드’에 어울리는 건물이라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지금도 검찰청과 서울 법원 사이의 공간에는 이런저런 사연을 가진 일인 시의와 집회가 거의 매일 열리고 있다.

사법기관들의 서초동 이전은 기존 청사들이 좁고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동 구청사에서는 조봉암, 조용수, 인혁당 희생자들의 ‘사법살인’이 일어났고, 1980년대 중반에는 검찰청과 법원으로 끌려온 학생들이 재판을 거부하고 민중가요를 부르는 등 법원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렸다. 이런 수많은 ‘흑역사’를 지우고 싶은 그들의 심리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선입견일가?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서울시와 땅을 바꾸어 남산 청사를 정리하고 내곡동으로 이사 간 국정원처럼, 신군부 출신 대통령이 자신이 하극상을 저지른 장소인 육군본부를 없애고 전쟁기념관을 지은 것처럼 말이다. 이런 작가의 ‘편견’과는 관계없이 사법기관들의 이전은 자연히 주변을 법조단지화시켰고, 강남을 정치적으로 보수화시킨 요인이 되었다. 미리 정보를 알고 땅을 사 돈을 번 법조계 인사들도 많았다고 한다. 물론 이런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변 사무실도 서초동에 있으니까 말이다.

반포로는 강남 성모병원과 국립중앙도서관 사이를 지나 언덕을 넘는다. 이 도로는 대법원과 검찰청 사이를 지나 8백년 묵은 향나무 앞에서 강남의 간판도로인 테헤란로를 만나 사거리를 이루고, 예술의 전당 앞에서 남부순환도로를 만나면서 끝이 난다. 약 1킬로미터 정도의 이 길은 서초동에서 가장 큰 길이기도 한데, 오피스빌딩이나 대형상가, 그리고 강남에 그렇게 흔한 아파트가 거의 보이지 않고 대형 공공건물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아주 특이한 공간이기도 하다. 국가를 이루는 삼부의 하나인 사법부의 정상 대법원과 검찰청, 국립중앙도서관, 서울고등법원, 대한민국학술원, 서울지방조달청, 국립외교원 등 중요 기관들이 밀집해 있다. 예술의 전당까지 합치면 청와대와 정부종합청사, 세종문화회관이 있는 세종로 다음가는 중요한 길이라고 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반포로를 공공건축의 섬이자 강남의 세종로라고 한다.

그러나 이 거리는 공간에 여유가 있음에도 어딘가 허전해 보이고 별로 걷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권위적인 분위기의 건축물들과, 그와 너무도 대비되는 식당과 변호사 사무실, 법무사 사무실들이 입주한 고만고만한 빌딩들, 그리고 무질서한 간판들 때문일까? 아니면 혹시 건국 이래 최대 참사였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의 기억이 바로 이곳에 어려 있기 때문일까? 온갖 탈법과 편법으로 지어지고 증축된 삼풍백화점은 바로 법원 길 건너에 있다. 그 자리에 지금은 주상복합이 들어섰고 참사의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사실 서초동 일대에 고만고만한 건물밖에 없는 이유는 고도 제한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을 굽어보지 못하도록 해놓은 조치이다. 비슷한 예는 여의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서초동과 같은 이유로 서여의도가 동여의도에 비해 건물이 훨씬 낮다. 서초동의 사법부든, 여의도의 입법부든 이렇게 한다고 해서 권위가 지켜지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최근 사랑의 교회 건축을 계기로 고도 제한이 풀렸다고 한다.

어쨌든 이렇게 공간 자체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게 만들어진 서초동 법원단지지만 싫건 좋건 기관들의 위상이 있으니 만큼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의 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대부분의 사법기관이 이전한 후 바로 벌어진 전두환, 노태우의 구속이었다. 비록 불완전하게 끝나긴 했지만 두 쿠데타 주범의 처벌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큰 의미를 가진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2009년 4월 30일, 노무현 대통령의 검찰 출두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이는 5월 23일의 비극으로 이어졌고, 많은 국민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지금 한국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검찰 출신 법조계 인사들이 바로 그 때의 수사팀이다.


▲12.12 및 5.18사건 선고공판에서 두 손을 잡고 피고인석에 서있는 전두환. 노태우 (1996, 경향신문)


▲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의 조사를 받기 위해 대검찰청에 도착,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2009)

1987년 6월 항쟁 이후, 우리는 제도의 민주화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사회 등 보다 심도 있는 민주화가 절실하고 이를 추진해야 나가야 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그 중에 가장 절실한 과제 중 하나가 사법기관들의 민주화 일 것이다. 아마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이 삭막한 반포로도 조금은 더 가까운 느낌을 받지 않을까? 부디 그런 날이 오길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