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巨山의 흔적을 찾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 ​

호불호를 떠나 말 그대로 한국현대사의 거목인 양김의 한 축인 김영삼이 작년 11월 22일,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다. 거제도는 현재 거가대교와 거제대교로 연결된 육지나 마찬가지지만 그가 태어난 1927년, 그런 다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묘하게도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동료였던 김대중 역시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가와 기념관은 부산 쪽에서 거가대교를 건너면 바로라고 할 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그는 3대 총선에서 약관 26세에 자유당 공천으로 고향 거제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 최연소 당선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승만의 연임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민관식 등 동지 10명과 자유당을 탈당하고, 1955년 새로 창당된 민주당의 창당발기인이 된다. 해공 신익희와 유석 조병옥 등 엄청난 거물들이 모인 이 당의 창당발기인은 33명에 불과했는데, 20대의 그가 그 일원이었던 것이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소속으로 그 후 30년 가까이 자신의 지역구가 되는 부산 서구 갑에 출마하지만, 낙선하였다. 그 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민주당 구파인 조병옥을 지원하였는데, 신파인 김대중은 장면을 지원하였다. 두 거목은 이렇게 운명적으로 맞서게 된 것이다. 어쨌든 김영삼은 4.19 혁명 이후 다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어 재기한다. 그의 거창한 호인 거산은 거제와 부산을 합쳐서 만든 것이다. 참고로 양김 이전의 거물 정치인인 신익희, 조병옥, 윤보선은 본명 보다 해공, 유석, 해위라는 호로 불리웠는데, 3김은 젊은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냈기에 거산, 후광, 운정이라 호 대신에 영문 애칭을 주로 쓰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의 ‘현대화’를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이리라. 1960년 8월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다시 여당생활을 하게 되지만, 민주당 구파 일부가 탈당해 신민당을 만들 때 참가하여 여당 생활은 불과 4개월로 끝나게 된다.

1961년 5.16쿠데타 후 군정의 실무를 맡은 김종필의 증언에 따르면, 본인이 직접 김영삼을 만나 새로 창당될 공화당에 합류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전부 다 군사정권 세력에 휩쓸리면 발전이 없습니다. 거기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걷는 길을 가겠습니다”라 거절했다고 한다. 군정 연장이 발표되자 김영삼은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한국 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이 가진 ‘경력’을 추가하게 된다. 출소 후에는 1963년 민주당 구파 출신들이 창당한 민정당 民政黨에 참여하였다. 이후 민중당, 신민당에 참가했고, 신민당의 원내총무와 대변인을 맡아 활동하던 도중, 초산테러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이 사건을 박 정권의 테러라고 주장했다. 1971년에는 그 유명한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 든다. 유진산 당수의 지원을 등에 업고 1차 경선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지만, 과반 득표에는 실패하면서 2차 경선이 이어졌다. 그런데 1차 투표에서 3등으로 탈락한 이철승 표가 김대중에게 옮겨가면서 김대중에 패배하고 만다. 하지만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적극적으로 그를 지원하면서 본인의 75년 대선도 함께 준비하려 했으나 유신을 맞게 된다.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한국현대사의 거목 YS를 만든 시기이기도 하다.

어쨌든 국회의원이 되고 중앙무대에서 활동하게 된 이상 서울에 거처를 마련해야 했는데, 그가 자리 잡은 곳은 바로 상도동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상도동’은 김대중 대통령의 자택이 위치했던 ‘동교동’과 단순한 서울의 한 동명이 아니라 대통령을 만들어낸 정치세력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로 발전했다. 상도동 上道洞이라는 동명은 그의 유명한 휘호 대도무문 大道無門과도 뜻이 통하고 고개 하나를 넘으면 그의 유해가 묻히는 동작동 국립묘지와 연결되니 여러모로 의미 있는 위치가 아닐 수 없다.

김영삼은 1974년 8월,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선출되면서 5년간 이어지는 반유신 투쟁의 선봉에 섰다. 이 기간 김대중은 거의 수감되었거나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기에 제도권에서는 그가 거의 모든 짐을 져야했고, 베트남사이공 함락 이후 이어지는 반공분위기에 밀려 총재직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79년 5월 이철승을 밀어내고 신민당 총재에 복귀했고, YH사건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유신정권은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과 의원직 제명을 자행했고, 이는 잘 알려진 대로 부마항쟁과 10.26으로 이어졌다.

1980년 봄, 그는 김대중, 김종필 등과 대권을 놓고 경쟁하였지만 전두환과 신군부의 5·17 쿠데타로 좌절되었다. 그 날 오전 10시, YS는 신군부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했지만, 5월 20일 상도동 자택에서 5.17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자행한 신군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오늘 계엄통치를 확대 강화한 5·17사태를, 민주회복이라는 국민적 목표를 배신한 폭거로 규정한다. 계엄당국의 강압통치로 빚어진 유혈사태는 이 나라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다."라는 내용의 기자회견문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가택연금 상태가 길어졌다. 하지만 82년 12월 DJ가 미국으로 떠난 후 상도동 자택은 한국 현대사의 전설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서도를 배웠고, 인생에서 거의 유일한 독서시간을 가졌다.

1983년 5월 18일 광주민주항쟁 3주년을 맞아 단식투쟁에 돌입한 그는 일주일 후,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 6월 9일까지 23일 동안 단식을 계속했다. 5월 29일 전두환의 측근 권익현은 서울대 병원을 방문하여 출국을 권유했지만, 그는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에 해외로 부치면 된다."며 되돌려보내는 패기를 보였다. 결국 홍남순, 문익환, 함석헌 등 재야인사들의 동조 단식이 일어나면서 이 단식투쟁은 5공의 철권통치에 금을 가게하고 민주화의 시작을 알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직접적으로는 가택연금 해제라는 성공을 거두었고 이미 결성한 민주산악회와 민추협을 통해 1985년의 신한민주당 돌풍,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의 승리까지 이끌어 내었다. 당연하게도 이 시기에 상도동이 가진 의미는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양김의 분열로 인한 12월 대선의 실패, 그리고 1990년의 3당 합당은 민주화 투사로서의 그의 위상을 크게 퇴색시켰다. 그럼에도 1992년 12월 대선에서 승리한 그는 자신의 정부를 최초의 `문민정부`로 규정하고 `신한국 창조`라는 국정 지표를 내세워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등 정치개혁은 물론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등 중요한 개혁을 실행하여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또한 12·12사태와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수감하는 큰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결단에만 의존해서 개혁이 진행되면서 문제점들이 지속적으로 노출되었고, 삼풍백화점 붕괴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사고, 그리고 한보비리사건 및 아들 김현철의 국정개입 등 일련의 사건으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집권 말기에 발생한 외환위기 상황에서 IMF관리체제를 수용함으로써 엄청난 국민적 비판 속에서 1998년 2월 임기를 마감했다. 그 후 김영삼 민주센터를 설립한 것 외에는 17년 동안 상도동 가까이 조용히 살다가 2015년 11월, 단식투쟁 때 입원했던 서울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 DJ가 묻힌 동작동 국립묘지에 영면했다.

현재 상도동 자택 옆에는 김영삼 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2012년 3월에 공사를 시작했고 현재 거의 완공되었지만 관리 주체 문제로 아직 개장은 하지 않았다. 기념도서관은 전체 면적 1만2천450㎡에 지하 4층, 지상 8층 규모로 2013년 5월 개관될 예정이었다. 콘크리트 벽돌을 쌓아 올린 듯한 건물 외관은 `시골 담벼락`과 `옥새`를 상징한다. 구체적으로 보면 ▲지하 3~4층 주차장 ▲지하 2층 공연장 ▲지하 1층(생애)·지상 1~2층 전시관(문민정부 8대 업적 등 공과·귀중품) ▲지상 3~5층 사무실 겸 도서관 ▲6~7층 연구 공간 ▲8층 김영삼민주센터 임원실 및 대통령 집무실 등으로 구성할 예정이라고 한다. 개장하면 동교동의 김대중 도서관과 비교하는 ‘재미’도 있지 않을 까 싶다. 과오도 저질렀지만 한국 민주화에 미친 그의 공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11월 22일 하루는 잠시라도 그를 생각하고 명복을 빌 정도의 여유는 가져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