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현대 노동운동의 시작 그리고 김수환의 시작 : 심도직물 터를 가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강화도가 우리나라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역사를 잘 모르는 이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단군이 제단을 쌓았다는 마니산부터 시작하여 고려의 임시수도, 병자호란의 무대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일어났던 수많은 외침의 현장이기도 했지만 현대로 와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전태일 열사 분신보다도 앞섰기에 우리나라 현대 노동운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심도직물 사건의 무대가 바로 강화도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한국 민주화 아니 한국 현대사의 거인 김수환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화문석이 유명한 강화도에는 그 전통 덕분인지 전성기에는 직물공장이 21개나 되었고, 종사자만 5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심도직물의 사주 김재소는 정치인이기 전에 1947년 심도직물을 설립하여 커튼과 넥타이 등 직물 수출에 힘쓴 기업인이었다. 참고로 심도沁都는 강화의 별칭이다. 사실 필자도 강도 江都라는 별명은 알고 있었지만 심도는 이번에야 처음 알았다. 심은 ‘스며든다’라는 뜻이니 피난 수도였던 강화도의 이미지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심도직물은 당시 100만 달러 이상을 수출하여 강화 아니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직물공장이었다.

하지만 심도직물의 노동력 착취는 극심했다. 결국 1967년, 미국인 전 미카엘 신부가 지도하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심도직할분회가 설립되었고 노사 간의 대립이 본격화된다. 당시, 심도직물 1200여 명의 종업원 중 900여 명이 조합원이었다. 이에 사측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노조와해공작을 시도하다가 1968년 1월 초에는 노조 분회장 및 조합원 등 16명의 노동자들을 해고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심도직물 사건이 시작되었는데, 해고자들은 전부 천주교 신자였다. 해고조치와 동시에 김 사장과 직물협의회 임원들은 전 미카엘 신부를 찾아가 노조활동에 간섭한다는 항의와 함께 반공법으로 구속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유명한 밀러 맥주 창업자의 외손자인 전 미카엘 신부는 사재까지 털어 주민들에게 밀가루를 주고, 땅을 사 집을 짓도록 해주고 돼지새끼와 앙고라 토끼를 불하해 주민들의 자립을 도왔던 인물이기도 했다.

1월 8일, 강화도 내 21개 직물회사들의 대표들이 모여, 전 신부의 사상이 의심스러우며 앞으로 JOC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7개항의 결의문을 작성하고 이를 중앙일간지에 발표했다. 운명적이었겠지만 JOC의 총재는 불과 1년 반 전에 마산 교구의 주교가 된 김수환이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만 46세였다. 그는 즉시 조사단을 구성해 조사에 착수했다. 이후 김수환 주교는 강화 성당에 와 미사를 집전하고 십자가를 진 연약한 소녀여공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구체적인 조사를 마친 김수환 주교는 주교단 회의를 주도해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회 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목자로서의 신부는 이러한 정의와 권리를 가르칠 책임이 있다."라는 내용의 ‘사회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사회문제에 대한 찬주교 주교단의 첫 성명서였고 교황청은 격려서한을 보냈다.

정치권도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김재소 의원은 `우리도 금명간 성명서를 내서 진상을 밝히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신민당 김은하 국회의원은 `진실 규명을 위해 자료 수집에 착수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노동자들의 집단 해고문제가 한국현대사 최초로 정치문제로 비화된 것이다. 강화직물협의회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천주교 측에서도 이 사건을 천주교 박해 행위로 규정하며 공개사과를 계속 요구했다. 결국, 강화직물협의회는 2월에 이에 대한 해명서를 제출하며 JOC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등의 지난 결의사항을 철폐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고된 노동자들이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복직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노동자들 특히 어린 여공들의 처우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그때마다 전 신부는 그들을 끌어안았다. 특히 노동자들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미약하던 시절에도 전 신부는 그들을 껴안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향후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지만, 한국 현대사와 민주화의 거인 김수환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첫 사건이기도 했다. 그는 두 달 후 서울대교구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5월 29일, 착좌식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해 3월 28일, 한국 최초이자 당시 전세계에서 최연소로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이 서임은 한국 천주교의 영광이기도 했지만, 이 ‘타이틀’이 우리나라의 약자들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이’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언덕이 되었는지는 굳이 강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심도직물 사건 이후 1년에 만에 일어난 일이다.


유일하게 남은 심도직물 공장 굴뚝

이렇게 한국 현대사에 결코 작지 않은 사건이었지만 심도직물은 1970년대 일어난 ‘굵직한 사건’으로 묻혀지고 말았다. 또한 한 때는 국내 최대 규모였던 공장 역시 굴뚝의 일부 만 남기고 사라졌다. 2015년 5월 10일, 인천교구장 최기산 주교는 이 굴뚝 앞에서 ‘강화 심도직물 사건’을 기념하는 조형물 축복식을 주례했다. 인천교구 노동사목부(담당 김윤석 신부)가 주관한 이날 행사에는 홍승모 몬시뇰(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 등 교구 사제단과 가톨릭노동청년회·장년회 회원, 심도직물 노동자 출신 신자 등 150여 명이 함께 했다.

최 주교는 축복식 강론에서 “1960년대 심도직물에서 일하던 노동자 1200여 명은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등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다”며 “심도직물 사건은 노동자 편을 들기 힘든 사회적 여건에서 인천교구와 한국교회가 노동자와 연대함으로써 노동사목이 시작되는 계기를 부여했다”고 말했다.

조각가 차경진 미카엘 씨가 제작한 조형물은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을 모티브로 여성 노동자가 씨앗을 날리는 모습과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조형물 앞에 세워진 표지석에는 ‘가톨릭 노동사목의 시작’이라는 제목 아래 ‘이곳은 1968년, 산업화의 그늘에서 고통당하던 심도직물 등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한국 천주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가 그 첫 발을 내디딘 곳입니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당시 JOC 회원으로 심도직물에서 일했던 한청자 루치아 씨는 “그 때 고통은 말도 못할 정도였고 바른 말 한 마디만 해도 해고당하던 시절이었다”며 “50년이 지나 기념 조형물 축복식에 참석하니 옛 생각이 나 감개무량하다”고 밝혔다.


혈서로 쓴 호소문을 들고 있는 한청자(<노동청년> 62호) http://archives.kdemo.or.kr/isad/view/00884643

하지만 지금 현장에는 그 조형물이 없다. 한 참을 찾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근처에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니 설치된 후 이런저런 ‘항의’가 들어와 조용히 철거해 갔다는 것이다. 공장 굴뚝 아래에는 심도직물이 얼마나 큰 규모였고, 지역경제와 수출에 공헌했다는 ‘자랑’ 만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민주화운동이 받는 ‘푸대접’이 이 곳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현실에 서글퍼졌다.

어쨌든 심도직물 터는 고려궁지, 성공회 강화도 성당 등 볼거리가 주위에 많다. 강화도에 갈 기회가 있다면 말 그대로 10분 정도만 투자해도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니 한 번 들러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