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살겠다! 갈아보자!”, “비내리는 호남선” 두 전설의 주인공 : 해공 신익희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한국의 두 번째 큰 정당이자 ‘전통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본명’보다는 일반적으로 ‘민주당’이라 불리운다.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지만 11년간은 집권 여당이기도 했던 이 당을 빼놓고서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모르고 있지만 이 당은 올해 창당 60주년을 맞이했다. 바로 이 당의 뿌리이자 정식 당명보다 더 흔하게 부르는 ‘민주당’이 1955년에 창당되었기 때문이다.
60년 전인 1955년 9월 18일, 이 당이 창당되었을 때, 모인 인물들은 장면, 조병옥, 곽상훈, 김도연 등 그야말로 쟁쟁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량감 있는 인물은 역시 해공 신익희였다. 신익희는 갑오경장, 동학혁명, 청일전쟁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운명적인 해일 수밖에 없었던 1894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0대 후반에 일본에 유학을 가서 신문물을 배운 그는 3.1운동의 주역을 맡았고, 20대 중반의 나이에 상해임시정부 내무와 외무 총장 대리를 맡을 정도로 독립운동가로서 촉망을 받았다. 이후 좌우를 넘나들며 엄청난 활약을 했지만 이 글의 목적은 독립운동가로서의 해공을 다루는 것이 아니기에 이 정도로 줄일 수밖에 없다. 해방 후, 이승만에 이어 2대 국회의장을 지낸 해공은 이승만의 독재와 독선에 넌더리를 내고 갈라서게 되었다. 국회의장 직에서 물러난 1954년 8월, 그는 효자동의 작은 한옥집으로 이사갔다. 이 집은 다행히 개발의 광풍속에도 건재하여 서울시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는 1956년 3월 28일에 5월 15일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었다. 1948년 이후, 우리나라에서 수많은 선거가 치러졌고, 수많은 구호가 내세워졌지만 60년 전인 1956년 5월, 정.부통령 선거 때 신익희 후보가 나선 민주당이 내걸었던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지금까지 전설처럼 남아있다.

단 여덟 글자로 된 이 선거구호는 당시 자유당의 부패와 무능, 독단에 넌더리를 내고 있던 국민들의 폐부를 찌르고도 남았다. 당시 자유당이 궁여지책으로 “갈아봤자 별 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란 구호를 내세운 것 자체가 이 구호가 얼마나 엄청난 힘을 발휘 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란 이 구호는 민심을 완전히 휘어잡은 걸작이자,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명구호 였다.

이미 부산과 대구에서 15만, 대전에서 2만, 서울 유세 전날인 5월 2일 인천에서 8만의 청중이 모여들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 후보와 부통령 후보 장면의 서울선거유세는 5월 3일 오후 2시 한강 백사장에서 열렸다. 당시 마포, 뚝섬, 광진, 강남, 여의도, 잠실 일대는 홍수가 나면 모두 물에 잠기고 강물이 마르면 넓은 백사장으로 변하는 곳이었다. 심한 경우 한강의 강폭은 최대 1,800에서 2,000m에 이르렀다가 갈수기에는 50에서 100m에 불과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제방이 축조되고 강변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해서 서울 동서간의 교통은 아주 편리해졌지만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바로 서울시민들의 한강 접근이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세느강이나 테임즈강의 접근성과 비교하면서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이렇게 한강변이 풍기던 전원적이고 예술적 풍경은 완전히 말살되고 말았다. 어쨌든 당시에는 엄청나게 넓었던 이촌동의 한강 백사장에 오전 11시부터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의 인구는 160만이었고 유권자는 70만 4천 이었는데, 거의 절반인 30만 이상이 몰려 든 것이었다! 당시 서울 시내의 버스는 637대 밖에 없었고, 전차 180대가 대중교통의 주력이었다. 12시에 버스와 전차는 만원이 되었고, 오후1시가 되자 삼각지 이남의 교통은 완전히 마비되었고 길은 시민들로 가득 차 버렸다. 백사장은 사람들로 인해 ‘흑사장’이 되어 버렸고 심지어 마이크도 안 들리는 한강 건너 흑석동과 한강 인도교에도 시민들이 가득찰 정도였다.  






15년 후,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 유세와 함께 한국 야당사에 ‘쌍벽’을 이루는 이 유세는 사라진 한강 백사장처럼 전설로 남았다. 신익희 대세론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고 관리들과 경찰들 까지도 은밀하게 신 후보 쪽에 줄을 섰을 정도였다. 당시 자유당의 부정선거 수법은 초보적이었기 때문에 정권 교체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운명은 가혹했다. 한강 백사장 선거 유세 후 불과 이틀도 되지 않은 5월 5일 새벽, 호남 지역 유세를 위해 열차에 오른 그는 뇌일혈을 일으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몸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는 너무나 하무하게 무산되고 말았다. 그 일은 무려 41년 후인 1997년에야 실현된다. 

사실상의 대통령을 잃은 국민들의 비탄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해공의 유해가 5월 5일 오후 4시, 서울역에 도착하자 효자동 자택에 모여든 군중들이 “사인을 규명하라!”며 유해를 경무대 쪽으로 끌고 가려하다가 경찰과 충돌하여 10여명이 경찰의 총탄에 희생되고 700여명이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시위는 1950년대에 있었던 최초의 반정부 민주화 시위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지금의 효자동 자택 주위는 한적하기만 하다. 

어쨌든 5월 15일 대통령 선거는 치러졌고, 이승만이 당선되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이승만의 득표는 504만 표 였지만, 사회당의 조봉암이 216만 표나 받았고, 죽은 신익희에게 던진 ‘추모표’가 185만 표나 되었다. 특히 서울에서는 신익희 추모표가 28만 4,359표로 이승만의 20만 여만 표를 압도했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이 압승을 거두었다. 말 그대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긴 셈이었다. 5월 23일 국민장이 엄수되었고, 1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수유동 자락에 묻힐 그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길에 함께 했다. 

‘목메이는 이별가’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박춘석, 손인호 콤비의 <비 내리는 호남선>이 대히트를 친 이유도 해공의 죽음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어쨌든 그의 죽음은 한국 야당사의 시작이자 반독재민주화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2016년은 해공의 서거 60주년이다.

  그의 유적은 효자동 자택과 수유동 묘 외에도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의 생가, 남한산성 아래의 동상이 있는데, 의외의 장소인 천호동 강동역 앞에도 동상이 서있다. 강동구가 당시에는 경기도 광주였기 때문이겠지만 동상 아래에는 “선생께서 높은 뜻을 펼치시던 이곳에 구민들의 뜻을 모아 강동구에서 건립하였습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정작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전혀 알리고 있지 않고, 뒤는 공사판이고 주위에는 흔해빠진 건물들만 서있다. 기릴 만한 인물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좋지만 좀 더 배려를 했으면 하는 바램은 욕심일까? 동상 옆에 서있는 해공의 어록 하나를 소개하면서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출해 내서 죽엄에서 되살아나 살길을 뚫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