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축소판 : 동일방직 여공 투쟁의 현장을 가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한국 현대사에서 인천의 위치는 독특하다. 개항과 함께 개화문물이 쏟아져 들어왔고, 차이나 타운을 만든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터를 잡았으며, 근대화된 공장들이 가장 먼저 집단적으로 들어선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근대 이후 러일전쟁, 인천상륙작전, 5.3 항쟁 등 많은 사건이 이 곳에서 일어났다. 또한 이 도시에는 한국 노동운동사, 민주화운동의 한 장을 ‘똥’과 ‘알몸’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단어로 기록한 동일방직이 있다. 필자가 취재를 위해 동인천 역에서 내려 동일방직 쪽으로 걸었는데, 가는 길에는 일제 시대에 지어진 듯한 건물도 적지 않다. 뜬금없이 서 있는 느낌의 아파트들을 제외하면 다른 도시의 구시가보다도 정체되어 1970, 80년대에 멈춰있는 듯 하다.

동일방직 인천공장은 주위 환경이 증명하듯이 일제 강점기 때 설립된 회사로써 당시의 이름은 동양방적이었다. 해방 후 미 군정청에 귀속되었고 공장장이었던 서정익이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노동자들은 사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6년에 노조를 결성하였고, 좌익계열인 전국노동자평의회(약칭 : 전평)의 핵심노조가 되었지만 전평이 2년 후 해체되면서 이후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고 5.16 이후 산별노조화 되면서 전국섬유노조 산하에서 어용화 되었다.  



 동일방직 노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전체 1,300명의 노동자 중 1천 명 이상이 여성이었지만 200여 명 밖에 안 되는 남성 노동자들이 노조를 좌지우지 하고 있다는 불합리한 구조였다. 남존여비 시대이기도 했지만 노조를 장악한 남성 노동자들은 회사에게 이러저런 당근을 받고 어용화 되었던 것이다. 이런 불합리한 노조의 구조가 바뀌게 된 계기는 산업선교회덕분이었다. 1957년에 출범한 이 조직은 영적 구원만으로 산업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장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인천산업선교회는 목회자에게 6개월 이상 노동현장을 체험하게 했는데. 조화순 목사가 선구자였다. 그녀는 1966년, 여성노동자 비중이 압도적인 동일방직에 ‘위장취업’을 했다. 조 목사는 노동을 하면서 ‘소모임 운동’을 통해 ‘나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압도적인 숫자임에도 남성 노동자들에게 눌려있던 여성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72년 노조 최초 아니 한국 최초로 여성 지부장 주길자의 선출이었다. 물론 사측과 어용 집행부의 방해가 있었지만 그녀들은 이겨낸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에 그녀의 인터뷰가 실릴 정도로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큰 전기가 되었다. 

도시산업선교회 지원을 받으면서 동일방직노조는 민주노조로 착실히 성장했다. 복지도 늘어났고 여성으로서 받은 차별 대우도 많이 시정되었다. 하지만 회사는 보고만 있지 않았다. 관계기관을 동원해 압박에 나섰고, 76년 7월 23일 노조지부장 이영숙이 경찰에 연행된 틈을 타 회사 측의 사주를 받은 고두영이 매수된 어용 대의원 24명만을 모아 전격적으로 대의원대회를 열고 자신을 지부장으로 선출하게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수백 명의 여성 조합원들은 즉각 농성에 돌입, 회사 측의 비열한 처사에 항의했다. 사흘째 농성이 계속되던 25일에는 농성조합원을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기에 이르렀다. 70여 명의 조합원들은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저항했으나 경찰은 곤봉과 주먹을 휘두르며 여성노동자들을 무차별 연행, 40여 명이 기절하고 14명이 부상당하고 두 사람이 정신병원에 입원 하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한편 ‘동일방직분규 수습대책회의’의 합의사항에 따라 이총각을 지부장으로 하여 새롭게 구성된 집행부는 78년 2월 21일을 대의원선거일로 공고하고 준비했지만, 선거당일 박성기 등 회사 측에 매수된 남성노동자 들이 투표장을 기습, 부근에 있던 여성노동자들에게 닥치는 대로 똥물을 퍼붓는 만행을 저지른 데 이어, 노조 사무실을 습격하여, 조합원들을 집단폭행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방조하고, 전국섬유노조는 3월 6일 동일방직노조를 사고지부로 처리하고, 이총각 지부장 및 부지부장 2명, 총무부장 등 4명을 ‘도시산업선교회와 관련이 있는 반조직행위자’라는 이유로 제명했으며, 회사 측은 124명의 조합원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그러자 해고노동자들은 각종 기도회·시위·농성 등을 통해 당국과 회사의 만행을 규탄하는 투쟁을 전개했으며, 종교계를 위시한 각계각층의 민주화 세력들이 이들의 투쟁을 지원했다. 그녀들의 바램은 35년이나 지난 2013년에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아 명예회복을 함으로써 겨우 이루어졌다. 동일방직노동자투쟁은 ‘알몸’,‘인분’으로 상징되는 처절한 저항과 극악한 탄압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70년대 노동운동의 전설적인 사건이 되었다. 


동일방직 부당해고근로자는 즉각 복직되어야 한다 @Openarchives



 1년 반 후, 서울에서 비슷한 처지의 여공들이 들고 일어났다. 바로 YH 여공들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동일방직 이상으로 처절했던 이 투쟁은 김경숙이라는 희생자까지 낳았다. 그리고 두 달 후 두 공장의 가녀린 여공들을 짓밟았던 유신체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술시중을 들던 젊은 모델과 여가수의 품에서 독재자가 쓰러짐으로써 종말을 맞았다. 

동일방직 여공들의 투쟁은 단순히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이 아니었다. 극심한 남존여비 사회에서 여성들이 최소한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고 일제 강점기부터 내려오는 억압구조에 대한 투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금 동일방직 공장에는 ‘당연하게도’ 그 투쟁을 기념하는 어떤 상징물도 남아 있지 않다. 1973년에 세상을 떠난 ‘창업주’ 서정익의 동상이 있을 뿐이다, 하기야 구로공단의 중심인 옛 가리봉 오거리에도 ‘수출의 다리’와 기업들의 상징물이 있을 뿐 산재희생자들의 위령비는 엉뚱하게 보라매 공원에 두는 나라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동일방직 ‘창업주’ 서정익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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