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벌의 전쟁 : 30년 전, 목동 철거민 투쟁의 현장을 가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영등포와 양천구 사이를 흐르는 안양천, 그리고 두 구를 이어주는 오목교. 천변에 깔끔하게 조성된 체육공원에서는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하며 늦가을을 즐기고 있다. 오목교의 외관은 서울의 하천에 걸려있는 다른 다리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 다리가 30년 전 안양천 변에 있는 판자촌의 존재와 철거민들의 결사적인 투쟁을 증언하는 몇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의 목동은 여의도와 더불어 한국 방송의 중심지이고 서울 서남권에서는 가장 부유한 아파트 단지이기고 하다, 최근에는 고층 주상복합이 들어오면서 세련미를 더하고 있지만 30년 전에는 지금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목동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양천현 관할이었기 때문에 양천벌이라 불리웠다. 1962년 말까지 김포군 소속이었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시에 편입되었지만 20년 동안 사실상 서울시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진공지대’였다. 64년부터 여의도, 영등포, 회현 등 서울시내 각 지의 무허가 주택에 살다가 집이 철거되면서 쓰레기차에 실려 서울시가 살라고 허가해 준 이 곳에 ‘쓰레기처럼 버려졌던’ 것이다.

당시 서울시장은 영원히 이 곳에서 살아도 좋다고 말했다고 한다. 갈대밭과 진흙투성이인 안양천 뚝방과 안양천변 저지대에 정착한 주민들은 수도 시설이 없어 30가구에 하나 꼴로 있는 펌프로 끌어올린 흙탕물을 걸러 밥을 지었다. 물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등불과 석유불을 썼고 벽돌 한 장씩 사서 쌓아 올리는 낙으로 판자촌에서의 고단한 하루하루를 견디어냈다. 비가 오면 건널 수가 없어서 배를 타고 다녔고 개천에는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여름에는 그 다리를 건너다가 빠져죽은 시체가 둑에 즐비할 정도였다.

동네는 가끔씩 들리는 비행기 소리를 제외하고는 조용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 비행기 때문에 동네의 운명이 바뀔 것이라고 상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준비해야 하는 전두환 정권은 여객기를 타고 오는 외국인들이 김포공항에 내리기 전 하늘에서 첫 번째로 보는 서울인 양천벌에 널려있는 판자촌을 방관 할 수 없었다. 3년간에 걸친 목동 철거민 투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83년 4월 12일, 서울시는 강서구(당시에는 양천구가 독립하기 전이었다) 목동과 신정동 지역에 136만평의 신시가지 조성 계획을 발표했다. 당초 이 계획은 개발지역의 땅을 서울시가 전량 사들이는 ‘토지공영개발’ 방식을 처음 시도하여 인구 10여 만 명의 수용이 가능한 주거지를 만든다고 하여 국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주민들도 처음에는 ‘서민들을 위해서 적은 규모의 주택을 많이 세워 임대해준다.’는 기사 내용에 너나 할 것 없이 반갑고 감사한 마음이었다. 당시 목동 일대에는 가구주 2,500세대, 세입자 5,200세대로 약 32,000여 명이 살고 있었다고 하지만 행정력이 잘 미치지 않는 곳이어서 이 숫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공사자재가 쌓여 있는 목동개발지구 모습

 어쨌든 주민들은 서울시가 ‘그래도 살게 해준’ 땅이었기에 아무 대책 없이 내몰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가옥주들은 그 작은 집을 몇 개로 쪼개서 세를 놓고 세입자들은 작은 방에 여섯, 일곱 명씩 살았다. 대부분 막노동이나 공장 일을 했고 종이를 줍거나 비닐하우스에서 일해주거나 하면서 겨우 살아가는 도시빈민들 이었다.

그러나 올림픽을 앞두고 돈이 필요했던 서울시는 5월 11일, 10~15평의 서민형 아파트 대신 20~58평형의 아파트를 짓겠다고 계획을 번복하면서 ‘당신들이 사는 집은 무허가 건물이다. 지금까지 살게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라. 다만 배려 차원에서 가옥 당 이주비 50만원과 아파트 입주권을 주되 입주권이나 이주비는 철거 확인 후에 주겠다.’ 라고 말을 바꾸었다.

주민들은 기가 막혔다. 애시당초 서울시가 철거민 정착지로 정해서 대지를 가구당 8평씩 분할해 주었던 곳이기에 완전히 ‘무허가’라 볼 수 없었고 주민들 스스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집을 지었던 피눈물 나는 터전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20년 동안 각종 공과금은 물론 취득세, 재산세, 건물 분 토지사용료 납부 등 국민으로서 의무는 다 하면서 이곳을 정착지로 알고 살았던 주민들에게 이런 당국의 발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주민들은 목동 성당을 거점으로 뭉치기 시작했고, 빈민운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관계기관에 진정서를 보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6월 6일, 도시빈민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김수환 추기경이 목동 성당을 방문하여 철거대책위원회 대표들을 만났다. 당시 전문적 빈민운동가였던 고 제정구 전 의원이 ‘행동대장’이 되어 이들을 지원했다.

8월 22일, 발표된 1차 아파트 분양 가격은 가장 작은 20평형이 2,100만원으로 가난한 주민들로서는 엄두도 못 낼 거액이었다. 8월 27일, 아파트 분양 가격에 당황한 주민들이 안양천 변 축구장에 모였고, 서울시장을 만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시위대는 어느새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김포가도를 거쳐 양화대교까지 몰려갔지만 출동한 전투경찰이 제지하자 바로 행진은 연좌 농성으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밤늦게까지 김포 진입로는 전면 차단됐고 성산대교 일대는 교통이 완전히 마비되어 일대는 극심한 교통 혼잡을 빚었다.

야간이 되자 경찰이 시위대를 폭력 진압하면서 한 할머니가 얼굴에 최루탄을 맞고 실신했고 많은 부녀자들이 폭행당했으며 100여 명이 연행됐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주민들은 심야까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오목교에서 목동 거리 쪽으로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여기서 무려 400여 명의 주민들이 경찰의 무차별 구타를 당하고 연행되었다.

이 시위는 엄청난 반향을 낳았다. 군사정권은 대학생들의 시위나 YH 또는 사북 같은 노동자들의 시위는 겪어보았지만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 일반 민중들의 시위 그것도 부녀자들과 할머니까지 가세한 극렬 시위는 처음이었다. 각 언론기관에 보도지침이 내려졌기에 이 시위를 다룬 언론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었다.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는 목동의 실상을 조사하여 시민들에게 알렸고 서울대, 이화여대 등에서는 목동 시위의 경과와 동기를 학보에 실어 이 문제를 학내에 알려 나갔다.

10월 말, 철거가 시작되고 날씨까지 추워지자 갈 곳 없는 주민들은 더욱 다급해졌다. 11월17일에는 400여 명의 주민들이 오목교에 나가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다가 한 명이 부상당했다. 12월 18일, 주민 500여 명은 경인고속도로를 네 번이나 차단하면서 생존권 보장을 외쳤지만 전경들은 폭력 진압 후 23명을 구로 경찰서로 연행했다.

그러나 단결해서 투쟁하는 길밖에 없었던 주민들은 지치지 않고 싸웠다. 가옥주 300여 명이 시청 앞 광장에서 농성했고 구청, 목동 개발사업소, 파출소, 김대중 귀국 환영회 등 여론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하나된 목소리를 외쳤다. 심지어 여의도 신민당사를 점거해서 5일 동안 단식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점차 많은 학생들이 철거민들과 함께 했다. 83년 11월 22일 오후 5시,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학생 수백명이 목동오거리에서 철거민들과 함께 시위를 펼쳤다.

1985년 3월 20일, 오후 6시 경에는 오목 네거리에서 수백명의 학생들이 주민들과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했고,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처참한 공방전이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당시 신학생으로 목동에서 도시빈민운동에 참가했던 박병구(46)씨는 목동 철거민 투쟁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80년대 초에는 학생운동의 시위도 상당히 제한적이었고 민중운동 차원에서는 목동 주민들이 처음으로 집단 행동을 한 것이었어요. 구호 속에 ‘주민의 생존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군사정권은 물러가라’라든가, ‘대한민국 국민임을 포기하겠다’라는 결의가 있었을 만큼 생존권을 넘어 정치적인 부분까지 언급했었죠.”

목동 투쟁은 무려 3년이나 계속되었다. 그 동안 주민들은 싸우면서 단련되고 진화했다. 내부적으로 철야 경비조와 지역 대기조를 만들어 경찰력을 견제했고 주민 스스로 회장, 부회장, 총무, 각 통·반장 등 조직체계를 구성하고 민주적인 운영으로 각종 투쟁을 진행했다.

결국 가옥주건 세입자건 대책이 거의 없었던 목동 개발 사업에서 이런 투쟁으로 가옥주들은 처음으로 무허가 주택의 재산권을 인정받았고, 세입자들은 10평 짜리 임대아파트 입주권과 저렴한 이자의 이주비용 융자 약속을 받고 기나긴 투쟁은 끝이 났다. 목동 투쟁은 엄청난 기록을 남겼다. 시위는 총 49회, 시장, 구청장, 경찰서장, 국회의원 등과의 대화가 78회였다. 투쟁이 마무리 되자 대부분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고 입주권을 끝까지 거부하고 생활 터전을 요구하던 105세대는 제정구 전 의원의 주선으로 현재의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정부의 융자금으로 공동체적 설계를 한 목화 연립을 건설하여 시흥을 새로운 터전으로 만들었다. 목동투쟁은 이후 서울시가 대규모 신시가지 개발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3년에 걸친 서울시 도시 개발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기도 했다.

화려한 현대 도시 목동에는 당시의 흔적을 알려주는 존재는 거의 없다. 철거민들의 구심점이었던 목동 성당조차 1996년 새 성전이 건축되면서 헐렸고 그 자리에는 고층 주상복합이 들어서 있다. 그나마 오목교와 양화교 정도만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이 다리에 조그만 기념표석 하나 설치할 여유조차 우리에게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