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사건의 무대 : 부산 보수동 책방 골목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전두환 정권 초기였던 1981년 9월, 훗날 울산에서 3선 의원이 되는 최병국 검사가 지휘하는 공안 당국이 부산 지역에서 사회과학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1982년 4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영장 없이 체포하고 짧게는 20일에서 길게는 63일 동안 감금하였다. 이유는 당시 ‘불온서적’으로 규정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역사란 무엇인가> 등 ‘이적표현물’을 학습했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집권 초기에 통치기반을 확보하고자 조작한 기획 사건이었다. 그들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하여 강제로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이렇게 독서모임이나 몇 명이 다방에 앉아서 나눈 이야기들이 ‘정부 전복’을 꾀하는 ‘반국가단체’의 `이적 표현물 학습`과 `반국가단체 찬양 및 고무`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이들 중에는 재판을 받으러 법원에 와서 처음 대면하였을 정도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니 얼마나 엉터리 수사였는지를 알 수 있다. 두 달 전 서울지역 학생 등이 학림다방에서 첫 모임을 가진 이후 무더기로 구속된 용공조작사건인 `학림(學林)사건`에 이어 부산에서 사건이 터지자(정확하게는 만들어낸), `부산의 학림사건’이라는 뜻에서 `부림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체포된 22명 중 19명이 국가보안법, 계엄법, 집시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6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세무전문’ 변호사였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광일, 이흥록 변호사 등과 함께 변론을 맡아, 이를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피해자들은 1983년 성탄절까지는 모두석방되었고 이후 부산 지역 민주화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2013년, 이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변호인>은 송우석 변호사 즉 노무현 역을 맡은 송강호를 위시한 배우들의 열연과 탄탄한 스토리로 천 만 관객을 넘어설 정도로 크게 성공하였다.


영화 <변호인> 중


사건 피해자들은 1999년, 사법부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되었다. 그러나 2006년에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다시 재항고하여 2009년 대법원에서 계엄법과 집시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에 대해서는 재심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받았다. 이후 남아있는 유죄판결에 대해 2차 재심을 청구하여 2014년 2월 13일, 부산지법에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검찰 측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 부분을 근거로 대법원에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9월 25일 대법원은 재심 상고심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면서 33년에 걸친 부림사건은 막을 내렸다. 



사실 부림 사건의 공간적인 흔적은 지금 별로 남아 있지 않다. 22명의 ‘불순분자’들이 고문을 당한 ‘조사실’은 부산역과 초량 사이에 있었지만 지금은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최병국과 수사검사(지금은 세월호 조사위원을 맡고 있음) 고영주는 지금도 ‘정당한 수사와 조사’ 였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런데 ‘정당한 수사’ 가 이루어졌던 그 장소는 왜 사라졌을까? 하기야 박정희가 최후를 맞은 안가, 서빙고의 고문실, 석관동의 안기부도 모두 사라졌는데, 한낱 지방 도시의 한 조사실이 무슨 대수겠는가? 당시 ‘송우석 변호사’의 치열한 변론의 무대가 되었던 부산지방법원도 새로운 청사로 이전하여 사라진지 오래다, 영화에서 송우석 변호사가 달걀을 맞았던 장소는 대전에 위치한 옛 충남도청이다.       



현재 부림 사건의 흔적 중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곳은 80년대 정취를 거의 보존하고 있는 중구의 ‘보수동 책방 골목’이다. 이곳에서 시작된 양서협동조합은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출옥한 김형기 목사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소비자협동조합이자 문화공동체였다. 1970년대 말 부산 지역 민주화 운동 세력의 집결지 역할을 했으며, 지금도 보수동에 건재한 중부교회의 스터디그룹이 비판적 지식인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발기되었다.



 
당시 협동서점             현 협동서점 건물


1977년 10월부터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의 출범을 위한 준비모임을 정기적으로 갖기 시작하면서, 이듬해 4월 2일 창립총회를 열고, 같은 달 22일에는 보수동 서점 골목에 협동서점을 열었다. 조합원 2인이상 추천과 가입금 2,000원 및 출자금 매월 1구좌 1,000원이상을 내면 조합원이 될 수 있었는데, 출자액과는 상관없이 조합원 1명당 1표의 투표권이 주어졌다.



운영 원칙은 정치적·종교적 중립을 지키고, 조합원 교육을 통해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것이었다. 창립 당시의 회원은 107명이었으나, 1978년 말에는 300여 명, 운명의 1979년 10월에는 570여 명으로 늘어났다.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자, 유신 정권은 양서협동조합 회원들을 항쟁의 배후로 몰아 책과 서류를 압수하고, 조합원 300여 명을 연행하였다. 곧이어 10·26사건이 일어나자 모두 풀려났지만, 조합은 다음달 19일에 강제 해산되었다. 해산된 뒤에도 상당수의 회원들은 계속 모임을 가졌고, 결국 1981년 부림사건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1982년의 부산미국문화원방화사건의 주모자 문부식·김은숙도 이 조합 출신이다. 당시 양서조합이 있던 건물은 지금도 건재하지만 구멍가게로 바뀌어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6.25 이후 피난민들이 헌책들을 모아 노점상을 하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반 서적은 물론 다본 참고서나 고시서들이 많이 거래되었는데, 영화<변호인>에서 막노동을 하던 주인공 송우석의 아들이 태어나자 헌책방에 팔았던 고시책을 다시 사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여기서 촬영된 것이다. 이 곳에는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이 정말 적당한 규모로 서있어 책방골목의 역사를 증언하고 문화인들과 독서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




보수동 책방 골목은 부산 최대의 관광지 해운대에서는 거리가 있지만 주위에 민주화 운동 유적이 많이 있다. 6월항쟁 당시 6월 16일부터 22일까지 지속되었던 부산카톨릭센터농성의 현장인데, <변호인>에서도 박종철 열사의 영정을 들고 가두시위를 하는 장면이 바로 앞에서 촬영되었다. 당시 부산 미국 문화원으로 사용되었던 부산근대역사관과 박종철 열사의 모교로서 추모비가 있는 혜광고등학교, 부산민주공원도 지척이다. 들어올려지는 영도다리, <변호인> 촬영지 안내판이 붙어있는 영도 영선동도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부산에 갈 일이 있다면 보수동을 중심으로 반나절 정도 여행을 하면서 그 때의 그 사람들을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보수동 책방골목 사이트  http://www.bosub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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