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화 유적지 답사기 11

 

한국 민주화의 성지, 명동성당

- 1987년 6월의 명동성당, 그리고 2003년 -

  

명동은 새로운 것의 진원지이고, 서울 시민의 희망을 앞서 표현해내는 곳이다. 2003년 6월, 명동은 한여름 날씨처럼 후덥지근하고 구름은 낮게 깔려 분주하다. 젊은이들은 여름에 유행할 패션을 앞서 두르고 나와 명동 거리를 활보한다. 명동은 패션의 거리이고, 외국인을 포함해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서울의 축소판이다. 옷, 신발, 액세서리, 햄버거, 한․양식당, 퓨전요리점, 은행, 백화점, 호텔……. 새로 생기느니 쇼핑몰이요, 그 중 절반은 먹거리로 채워진다.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걷기 시작한 길은 명동으로 접어들며 자꾸만 늦춰진다. 볼거리가 많아지기도 했거니와 인파에 묻혀 발이 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을지로 2가로 넘어가는 언덕을 오르는 동안 좀 색다른 풍경을 목격하게 되는 곳이 바로 명동성당 초입에서부터이다. 낯선 목소리의 외침이 들려 고개를 돌리니, 미얀마(버마) 민족민주동맹(NLD) 당원들이 ‘아웅산 수지 여사의 석방’을 호소하고 있다. 그들이 들고 있는 피켓 중에 “당신들의 자유를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조금만 사용해 주세요” 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어느새 우리가 다른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자유를 나눠줄 입장이 되었단 말인가. 불과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야 하지 않았던가.

명동성당으로 오르는 언덕길에는 또 다른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NEIS를 반대하는 인권운동가들의 단식 농성이 바로 그것. 농성(籠城)이란, ‘어떤 목적을 위해 줄곧 한 자리에 머물면서 떠나지 않고 버티는 일’이 아닌가. 무엇보다 사람들이 농성 장소로 명동성당을 선택하는 것은 그만큼 농성의 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한 것일 터. 부챗살처럼 퍼져 내려간 명동성당 언덕길은 지나는 시민들의 눈과 귀를 집중시킬 수 있고, 또한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뒤에 계시니 농성을 하기에는 든든하기가 그만이다. 모름지기 안과 밖에서 함께 알을 깨는 ‘줄탁지기’의 효과를 극대화하기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6월항쟁의 불씨를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이한열 열사 장례식)



안에서 밖에서, 함께 외치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1987년 6월의 명동성당을 안내해 주기 위해 명동성당을 찾아온 당시 ‘가톨릭문화운동협의회’ 회원 두 분을 만났다. 김현순(43․시민방송 근무)씨와 김정표(41․어린이집 교사)씨는 흔히 ‘먹자골목 또는 패널골목’이라 불리는 골목으로 들어가 늦은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중앙극장으로 통하는 그 골목은 당시에 소위 운동권이라 불리던 사람들의 아지트가 되곤 했던 곳. 명동일대에서 아이쇼핑만 하고 출출한 속을 채우기 위해 자주 찾던 그 곳은 현재에도 저렴하게 식사를 하기에 좋고, 아직도 액자나 유리가게들이 늘어서 있어 패널골목이란 이름의 유래를 짐작케 한다. 김현순씨는 “이 길을 지나다 보면 아는 사람들을 자주 만났어요. 식당마다 민중가요가 목청껏 흘러나오곤 했지요”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1987년 6월 10일, 신세계 앞 로터리와 퇴계로, 명동 주변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던 학생․시민․노동자 등 800여 명이 명동성동으로 집결한 것은 사실 우연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당시 명동성당이 지니고 있던 의미를 살펴본다면 결코 우연일 수도 없는 것. 김현순․김정표 씨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명동성당은 이미 80년대 초반부터 시위의 마지막 집결지였고, 광주민중항쟁을 널리 알리게 된 중요한 시발지였다. 김정표 씨에 따르면 83-84년부터 시민들에게 보여주기 시작한 ‘광주민중항쟁 비디오’는 85년부터는 성당 밖에 대자보를 붙여 알리게까지 되었다고 한다.

“당국에서도 명동성당 안에서 비디오를 보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어요. 광주 이야기는 그저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시민들도 눈으로 목격하기는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점심시간이 되면 넥타이를 맨 회사원들이 로얄호텔 앞에까지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지요. 자막도 없는 독일․일본판 비디오를 300명 정도가 들어가는 ‘문화관’ 1층에서 상영했는데, 텔레비전 모니터가 열을 받기 때문에 양쪽에서 교대로 틀 정도였어요. 그러다 보니 입소문이 퍼져 해마다 5월만 되면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던 거죠.”

모처럼 신세계 앞 분수대 광장을 메우고 시위다운 시위를 했던 학생과 시민들은 전경들에 밀려 조금씩 조금씩 명동성당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6월 10일 밤부터 6월 15일 오전 11시 해산하기까지, 명동성당으로 몰려와 농성을 시작한 시위대는 바깥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그야말로 알을 깨고 나오는 줄탁을 이룬 셈이다. 김현순․김정표씨와 함께 명동성당 언덕을 올라가며 들으니, 지금은 당시보다 언덕길이 조금 넓어진 듯하다. 87년 당시에는 왼편으로 좁은 계단이 있었고, 차가 다니는 오른편 길도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었다고 한다. 시위대는 그 맨 아래 언덕 초입에 합판을 이용해 엉성한 바리케이트를 치고 밤새 투석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리고 성당 앞마당에서는 5․18과 호헌을 규탄하는 대중집회가 열렸다. 이미 들어와 천막농성 중이던 상계동 철거민들은 시위대의 가장 큰 응원자들이 되었다. 시위대들은 철거민들의 천막에 들어가 자기도 하고 그냥 노천에서 신문지를 깔고 자기도 했다는데, 당시 철거민들의 천막이 있던 자리는 현재 결혼식 피로연 장소로 사용되는 별관이 들어서 있다.

별관을 따라 오른쪽 샛길로 들어가면 교구청 마당으로 연결되는데, 그곳은 사제들이 머무는 곳인지라 들어가 볼 수가 없다. 87년 당시에는 문화관 옆으로 나있는 계단을 통해서도 드나들었고, 특히나 부상을 입은 시위대가 치료를 받거나 쉬는 공간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문화관 옆쪽으로 통한 철문마저 굳게 닫혀 있어 들어가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나무숲이 시원하게 우거져 지친 몸을 쉬기에는 그만이었다는데,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서서히 밝아지는 본당 내부의 평안함

당시에도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이 거처하는 사제관과 일반인들이 이용하는 건물은 엄격하게 구분을 해서 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살폈다고 한다. 일반인들이 주로 이용했던 곳은 문화관과 교육관, 본당 마당과 교구청 마당, 그리고 성당 앞 진입로 등이었다. 특히 문화관은 가톨릭문화운동협의회 회원들이 주로 이용하던 장소인데, 시위대들이 들어온 뒤부터는 이들 지도부들이 회의를 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당시의 문화관 건물은 현재의 계단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미팅 룸과 문화패들이 이용하던 지하공간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성물보급소와 소 성당 등의 건물로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 문화관 건물은 현재 리모델링을 통해 최신 음향시설을 자랑하는 ‘꼬스트 홀’이 들어섰고, 오른쪽 건물도 2층에서 3층으로 증축되어 주로 일반 신자들이 이용하고 있다.

사적 258호로 지정되어 있는 명동성당 본당은 1894년에 공사를 시작해 1898년에 완성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 조 교회당이며, 순수한 고딕식 구조로 지어졌다. 평면은 라틴십자형 삼랑식이며 본당의 높이는 23m, 탑의 높이는 45m이다. 어느 성당이나 비슷할 터이지만 처음에 들어서면 웅장하고 경건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지만, 조금만 지나면 이처럼 평안한 곳도 없을 성싶다. 어두운 느낌의 실내 공간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해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어느새 가장 평안한 느낌의 밝음을 느끼게 된다. 87년 당시에도 시위를 하다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들어와 두 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명동성당 일대를 두르고 있는 검은 제복의 위압적인 전경들과 7년쯤은 감옥에서 썩어야 할 거라고 내심 마음을 추스르고 있던 당시의 농성자들에게 성당과 사제들의 지지는 절대적인 힘,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아무려나 명동성당은 큰 변화 없이 1987년 당시의 모습을 현재까지 지키고 있다. 하지만 소소한 부분에 있어서는 옛 흔적들이 지워진 곳이 없지 않다. 자원봉사자들이 빨래를 하던 문화관 앞 수돗가는 아주 사라졌으며, 문화관 옆 샛길은 문화관 증축 뒤에 막혀 계성여고 학생들이 도시락을 던져줬다는 당시의 창문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언니 오빠들에게 보냅니다. 많은 도움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 꼭 보고 싶은 언니 오빠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 웃으며 보고 싶습니다. 안녕 ― 동생들 보냅니다.” 농성 대들은 그 맑게 빛나던 눈망울의 여고생들에게서 자신들이 하는 일이 정당하다는 것을 읽었고, 더구나 “우리가 잘 해야 저 학생들이 민주화된 나라에서 살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와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에서 명동성당 농성의 해산을 권고했던 것은 대체로 애초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던 데다,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결집해야 하는 시점에서 초점을 분산시킬 것 등을 우려했던 듯하다. 그러나 올림픽을 앞둔 시점에서 명동성당 농성의 강제진압은 전두환 정권으로서도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6월 12일, 노태우가 직접 명동에 찾아왔던 것은 단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민심의 동향을 직시했을 것이고, 이는 속칭 ‘속이구’라고 불리기도 하는 ‘6․29선언’이라는 우회로를 선택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3차에 걸친 투표 끝에 6월 15일 해산을 하기까지 온 국민의 눈과 귀를 명동성당에 쏠리도록 해, 우리 국민 모두의 가슴 속에 용솟음치던 민주화의 갈망을 일깨우고 마침내 끌어 넘치게 만든 원동력은 큰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랑스럽고 뿌듯하지요. 우리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것이 몇몇 어른들이 아니라, 시민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일깨웠던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김현순 씨는 지금도 명동성당 언덕 받이에 서서 저 앞쪽 빌딩 숲을 바라보면, 창문을 열고 손수건을 흔들어 주던 와이셔츠 입은 사람들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고 한다.

 

2003년 6월 민주대광장, Oh Peace Corea

명동성당 농성은 비록 5일 만에 자진 해산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해산 이후의 집회에서도 최종 집결지는 명동성당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1987년을 기점으로 명동성당은 한국 민주화 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지가 된 것이 아닐까. 명동성당 언덕받이에 앉아 근방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근처의 빌딩 숲조차도 모두 아래로 내려다보이면서 포근하게 감싸인 듯싶다.

김현순․김정표 씨는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우고 치렀던 1987년 7월 9일의 ‘이한열 열사 장례식’을 잊을 수 없는 광경으로 기억한다. 맨 앞과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늘어선 대열, 인도와 차도가 모두 메워진 인파들……. 마치 세상이 금방 뒤집힐 것 같은 해방구처럼, 그 사람들의 물결은 벅찬 감동 그 자체였다.

그러나 무자비하게 진압해 들어오는 페퍼포그와 최루탄, 전경들의 군홧발. 1987년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보기에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촛불시위를 하는 현재의 모습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그땐 시청 앞 광장에서의 시위도 힘들어 신세계 앞 분수대에서부터 무참하게 짓밟혀야 했었는데 말이다. 아무려나 민주화는 단순히 물리력을 넘어서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애타게 원하는 그 만큼씩 넘어서게 되는 것 아닐까. 그리하여 작년 여름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을 붉은 물결로 뒤덮었던 월드컵의 함성조차도 민주화의 물결이 이룩한 도도한 흐름이 아니었을까.

지난 달 7일과 8일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한 ‘6월 민주대광장’, 6월 난장이 시청 앞 광장에서 있었다. 평화와 미래를 위한 콘서트를 비롯해 각종 퍼포먼스와 사진전, 그리고 열린 음악회와 월드컵의 함성을 재현하는 거리응원전까지. 1987년이든 2003년이든, 민주화 투쟁이든 촛불시위든, 그때 그 자리를 어깨 걸고 함께 했던 사람들은 민주화가 얼마나 소중하고 간절하게 다가오는 것인지 몸소 느꼈을 것이다. 시민들과 함께 맞이하는 6월 난장, 민주대광장, 6월의 햇살이 진 시청 앞 광장의 맨바닥이 얼마나 따뜻한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지, 혹은 한마음으로 외치는 함성이 시청 앞 광장을 어떻게 휘돌아 가슴 속으로 메아리 치는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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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시 림

소설가. 1972년 충북 제천 출생. 1999년 <진주신문> 가을문예와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발표작으로 「기둥」, 「용꿈」, 「믹스언매치」, 「소멸의 흔적」 등이 있음. wonsi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