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어느 날.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서...
서대문 형무소
 

글 한종수 작가 wiking@hanmail.net
 

 

3월의 시작은 당연히 3월 1일이다. 3월 1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한국인들은 없을 것이다. 삼일절하면 생각나는 장소는 당연히 탑골공원이겠지만 그 다음 가는 장소라면 단연 현저동의 서대문형무소가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한국 근현대사 100여 년간 가장 중요한 건물이라고 생각한다. 한일합방이 이뤄지기도 전인 1907년 - 군대 해산 등 한국사에서 굵직한 사건이 많이 일어난 해 - 에 간수 출신 시텐노의 설계로 공사를 시작한 이 형무소는 다음 해 10월 21일에 "경성감옥" 이란 이름으로 80평 규모의 감방과 80평 정도의 부속시설, 수용인원 500여 명 규모로 문을 열었다. 당시 전국 8개 감옥 총 수용인원이 300여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큰 규모였던지 짐작이 된다. 하지만 금세 부족해졌고 그들은 마포 공덕동에 또 다른 감옥을 짓고, 이곳의 이름을 "서대문감옥"으로 바꾸었다. 참고로 공덕동 감옥 터에는 지금 서부지원과 검찰청이 들어서 있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서대문감옥은 30년대 후반에는 1만 5천 평이 넘을 정도로 확장되었다. 80년 동안 35만 명을 가두고 한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1987년에 문을 닫았다. 건설연도와 폐쇄연도부터 범상치 않아 보이지 않는가?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 실패로 허위, 이인영, 이강년 등 의병장들이 이곳에 갇혔고, 허위 선생은 서대문형무소 첫 번째 순국자로 이름을 남겼다. 김구, 안창호, 한용운, 손병희, 유관순, 윤봉길, 여운형, 심훈, 김광섭, 함석헌, 심훈, 강우규, 송학선, 최현배, 이희승, 김교신, 이재명, 안명근, 허헌, 양기탁, 홍명희, 조병옥, 이현상, 김동삼, 유림, 조봉암... 1945년 까지 이곳에 갇히고 옥사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리진 지사들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차라리 이곳에 갇히지 않았던 지사들을 찾는 편이 훨씬 빠를 정도다. 하지만 이곳의 비극은 45년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곳의 역사 증언성과 현장성은 그 어느 것보다 밀도 높고 광범위하며,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이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저항정신 민족의 저항정신이 살아있는 곳인 동시에 해방 후 군사정권의 어두운 이면이기도 하다. 이곳에 수감된 사람의 이름과 사연만으로도 능히 한국근현대사를 가로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곳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너무 민족주의라는 한 가지 입장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모던 스케이프, 박성진 글)



많은 독립투사들이 나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상범들로 가득차고 말았다. 그 중 하나가 박정희였다. 당시에는 그의 사상이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반민특위가 활동하면서 매국노들이 수감될 때도 있었지만 얼마가지 못했고, 오히려 최능진 같은 애국지사가 수감되고 희생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얼마 전 반세기 만에 무죄판결을 받은 죽산 조봉암 선생이 1958년에 이곳에서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1960년 4·19혁명 때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다시 이 감옥을 가득 메웠지만 이승만의 하야와 함께 부정선거 주모자들과 정치깡패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최인규, 곽영주, 이정재, 임화수 등은 죗값을 받았다. 하지만 민주주의 봄은 짧았다. 1961년 박정희의 집권이 시작되면서 서대문형무소는 다시 수많은 억울한 희생자를 낳았다. 1962년, 조봉암 선생과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이 희생되었다. 이 후 동베를린사건, 민청학련사건 등 많은 소위 시국사건으로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옥고를 치렀고 도예종 등 민청학련 관계자 8분은 이곳에서 말 그대로 ‘사법살인’을 당하고 말았다.

옛날 서대문형무소에는 격벽으로 되어있는 재소자 운동시설이 있었는데, 그 인근에 지옥의 삼정목(三丁目)이라고 불리는 삼거리가 있었다. 교도관들이 재소자들을 데리고 운동시설을 지나서 키 큰 미루나무가 서 있는 쪽으로 가면 바로 옆에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15평정도 되는 일본식 목조건물이 있었다.(지금도 보존하고 있음)  바로 이 건물이 ‘넥타이 공장’이라 불리운 사형장이다. 수많은 독립투사들과 민주인사들이 세상을 떠난 한 맺힌 장소이기도 하다. 자세히 보면 벽 밖에 있는 키 큰 미루나무 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벽 안에도 작은 키의 미루나무가 하나 더 있다. 놀랍게도 두 나무는 같이 심었다고 한다. 교도관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안쪽에 있는 미루나무는 사형수들의 한 때문에 크지 못했다고 한다. 사형장에 들어서기 전 독립투사와 민주투사들은 큰 미루나무에 손을 짚고 오열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무는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별명이 붙었다. 정호승 시인이 이 나무를 시로 읊었다. 


 
 


사형장 사진




                                  


통곡의 미루나무







서대문 공원



서대문공원에 가면

사람을 자식으로 둔 나무가 있다



폐허인 양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사형 집행장 정문 앞

유난히 바람에 흔들리는

미루나무



미루나무는 말했다

사형집행이 있는 날이면

애써 눈물은 감추고 말했다



그래 그래

네가 바로 내 아들이다

그래 그래

네가 바로 내 딸이다



그렇게 말하고

울지 말고 잘 가라고

몇날 며칠 바람에 몸을 맡겼다  
 



‘넥타이 공장’ 지하에는 시신들을 외부로 반출할 수 있는 통로인 시구문까지 완비되어 있다. 목숨을 잃은 분외에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른 민주인사는 여섯 차례나 수감된 문익환 목사님 외, 김대중 전 대통령, 서남동, 송건호, 리영희, 문동환, 이문영, 이돈명, 한승헌, 이소선, 이부영, 문정현, 함세웅, 김지하, 최열, 조화순, 조성우, 박형규, 장준하, 이호철, 한승헌, 김상현, 김홍일, 윤이상, 천상병, 이응로, 문재인, 백기완, 김거성 등... 독립투사와 마찬가지로 역시 민주인사 들 중 이 곳에 수감 안 된 분들을 찾는 쪽이 빠르다.  

물론 지하의 취조실에서는 일제강점기 시대와 마찬가지로 온갖 고문과 만행이 자행되었다. 달라진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민주화운동이 독립운동의 맥을 잇고 있으며 독재 권력이 일제의 맥을 잇고 있다는 생생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서대문형무소는 우리 현대사의 최대 증인답게 1987년 6월 항쟁 기간 수많은 청년 학생들을 가두었다. 항쟁이 승리하자 마치 마지막 일을 다 했다는 듯이 의왕교도소에 역할을 넘기고 감옥으로서는 수명을 다한다. 군사정권의 기묘한 연장이었던 6공화국 정부는 역할을 다한 서대문형무소를 민간에 불하해 아파트 단지로 만들려고 했다. 그들의 죄상을 증거인멸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독립 운동가들의 격렬한 반대로 보존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보존 가치’라는 기준 아닌 기준이 적용되면서 반 이상의 건물이 사라져버렸으며 망루는 두 개만 남았고, 담장도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군사정권의 후예들이 공원화를 열심히 추진하여 대신 꼭 필요한지 의심스러운 공원과 기념비가 들어섰다. 그래도 ‘현대적 형무소 건축’의 전형 즉 가장 감시하게 편하게 만들어진 파놉티콘(원형 감옥) 형식을 갖춘 옥사는 남았다. 이 옥사는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원형을 보존한 주요한 사례라고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 가보시면 된다. 다행히 남영동 대공분실과는 다르게 주말에도 문을 연다.   

91년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문을 열었지만 군사정권의 후예들의 의도대로 민주화운동의 흔적은 거의 남지 않았다. 다행히 역사에 관심이 많은 새 구청장이 추임하면서 조금씩 복원이 되고 있으며 김대중 대통령이 수감되었던 방에는 표식도 생겼고 이영희, 이소선, 이돈명 선생의 풋 프린팅이 있는 방도 마련되었다. 





이영희 선생 풋 프린팅







마지막으로 한승헌 변호사님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이곳을 방문할 때 입장료를 내시면서 이런 농담을 하셨다고 한다. 

“전에는 공짜로 들어왔는데 이젠 돈을 내라니 야박해 졌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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