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김근태의 길을 가다. 
-남영동 대공분실과 상지회관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2011년 12월 30일, 투병 중이던 김근태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민청련) 의장이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전국이 충격에 휩싸였다. 고문 후유증이 사인 중 하나였기에 다시 한 번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김근태 전 의장은 자신의 고문 기록을 <남영동>이란 제목의 책으로 엮었고, 이 책을 정지영 감독이 최근 <남영동 1985>로 영화화했다.

필자는 이 영화를 문재인, 안철수 후보와 함께 시사회에서 보았다. 같이 간 선배는 실제 남영동에서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한 피해자였다. 영화를 보면 고문실에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남산이나 서빙고는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소리 때문에 고문피해자들은 자신이 갇힌 곳이 남영동인지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고문을 당한 피해자 중 일부는 전철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나서 선배한테 본 소감이 어떠냐고 묻자 대답이 걸작이었다. “이경영이 이근안과 달리 너무 잘 생겨 몰입이 안 되더라.” 이근안은 ‘고문의 공적’으로 다음 해인 1986년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김근태는 고문을 당하면서 그의 인상착의를 기억했다가 뒷날 이선근ㆍ박문식 등 같은 피해자들과 함께 사진 속의 인물이 이근안임을 밝혀냈다.

영화 줄거리를 미리 소개하면 요즘에는 스포일러라고 눈총을 받지만 이 영화는 공개할 줄거리랄 것도 없다. 거의 고문 장면으로 채워져 있어서 영화의 주인공이 ‘김종태’가 아니라 ‘고문실’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이고 등장하는 배우도 열 명이나 될까? 요즘 쓰는 말로 ‘돌직구’그 자체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보기 바란다.

남영동 대공분실



남영동 대공분실 5층의 고문실 중 박종철 열사가 희생된 509호실을 제외한 나머지 방들은 모두 원형을 잃었다. 509호실은 15㎡인데 515호실은 30㎡ 정도는 되어 보이고, 다른 대다수의 조사실보다 창이 1개가 더 많은 3개다. ‘거물’에 대한 예우일까? 조사실 리모델링 이후 원형 복원이 되지 않아 과거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은 매우 아쉽다. 영화의 고문실과 똑같을까?

김근태는 제15~17대 국회의원과 열린우리당 의장, 보건복지부 장관 등 나름대로 경력이 화려하지만 김근태를 가장 김근태답게 하는 직함은 역시 ‘민청련 초대의장’일 것이다. 그렇다면 김근태가 의장을 맡았기에 그렇게 참혹한 고문을 당해야 했던 민청련이란 조직은 어디서 탄생했을까? 지금 보기에는 의외의 장소였다. 지금은 상지 피정의 집이라고 불리고 당시에는 상지회관이라고 불렸던 베네딕트회 소유의 수도원이었다.

사실 상지회관은 대로에서 멀리 떨어진 아리랑 고개 위 주택가에 있어서 행사를 열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엄혹한 당시 상황에서 종교 시설을 제외한 다른 공간을 얻기는 불가능했고 그나마 눈에 띄는 공간도 얻기 힘들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실 참석자 대부분은 이 회관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고 당일 날 안내자의 안내를 받고 찾아왔을 정도였다. 그나마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의 주선이 없었다면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모인 곳은 1층의 강당이었다. 지금도 이 수도원은 건재하고 건물도 그대로다. 아늑한 분위기의 성모 동산이 인상적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지는 1972년 육영수 ‘여사’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가면 된다.

 

상지회관



1983년 9월 30일, 저녁 7시를 전후하여 150여 명의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있는 가톨릭 상지회관 주변에 어수룩한 차림의 청년들이 긴장된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 지 3년여 만에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봉화를 들어 올린 민청련의 창립대회에 참석하고자 모여든 청년들이었다. 1970년대 유신독재 시대, 청춘을 바쳐 온몸으로 독재정권과 싸워온 학생운동 출신 청년 활동가들이 민주화투쟁을 다시 시작하고자 굳은 결의로 모였다. 광주항쟁 이후 전두환 정권은 정당, 사회단체, 개인을 막론하고 일체의 정부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고 언론에도 재갈을 물렸던 터라 경찰의 감시가 삼엄했다. 뒤늦게 창립 장소를 알고 출동한 성북서 경찰들은 상지회관을 봉쇄하고 일부를 연행했지만 결국 창립 모임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이렇게 상당수가 성북경찰서로 연행되고 경찰의 삼엄한 포위 속에서 59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청련 결성식이 열렸다. 경찰들은 미리 회관 내에 들어와 있는 청년들도 전원 연행하겠다고 위협하면서 해산을 종용했다. 그러나 가톨릭 시설 내에 무단으로 침입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 자기들이 지목하고 있는 새 집행부 명단을 제시하고 창립대회가 끝나면 이들을 연행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일단 뒤로 물러난다.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내정된 집행부들도 일단 창립대회를 치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 요구를 수락했다. 공개 단체를 표방했기에 창립대회 후 연행한다면 막을 방법도 없었다.

경찰들과 옥신각신하는 동안 시간이 흘러 9시가 넘어서야 겨우 창립대회가 시작되었다. 경찰 때문에 많은 핵심 청년들이 참석하지 못했고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재야 어른들도 거의 모시지 못했다. 마치 1919년 2월 8일, 도쿄의 조선기독청년회관에서 유학생들이 2ㆍ8독립선언을 할 때 왜경의 포위 속에서 행사를 거행했던 것과 비슷했다. 64년의 시차를 두고 권력이 달랐을 뿐이다. 그나마 의장으로 내정되었던 김근태가 참석해 대회를 주관할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대회는 부의장으로 내정된 장영달이 ‘우리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지 않은가?’라는 제목의 발기문 낭독으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민주, 민중, 민족통일을 우리 모두에게’라는 창립선언문을 김근태 의장이 낭독함으로써 민청련은 공개대중 정치투쟁단체로서 정식 출범하게 되었다.

발기문과 창립선언문은 대회 준비과정에서 사전에 등사판으로 인쇄해 200여 부가 대회장에서 배포되었고, 외신을 비롯한 언론기관에도 보도자료와 함께 나갔다. 결국 국내언론에는 보도되지 못하고 일부 외신에만 보도되었다. 의장으로 내정자 김근태가 ‘민청련 창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고통과 희망을 한 몸에 안고 억압받는 제3세계 민중의 일원으로서 민족사의 전진에 앞장서야 할 청년으로서 (중략) 민주ㆍ통일을 위한 민주정치 확립, 민주자립경제의 확립, 자생적이고 창조적인 문화 교육 체계의 형성, 냉전체제해소와 핵전쟁방지”라는 내용의 선언문으로 김근태의 낭독 후 채택되었다. 창립선언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민족통일의 대과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참된 민주정치는 반드시 확립되어야 한다. ―. 평등하고 인간적인 생활을 위한 민주자립경제가 이룩되어야 하며, 부정부패 특권경제는 마땅히 청산되어야 한다. ―. 역동적이고 건강한 민중의 삶을 위하여 자생적이고, 창조적인 문화, 교육체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 국제평화와 민족 생존을 위해 냉전체제의 해소와 핵전쟁의 방지가 이루어져야 한다.“민청련은 투쟁성의 회복을 첫 번째 과제로 제시”하며,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오늘의 현실 상황은 뿔뿔이 흩어진 민주청년들이 다시 모여 민중운동의 흐름 속에서 양심적인 지식인ㆍ종교인ㆍ정치인ㆍ노동자ㆍ농민들과 연대를 강화하면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회건설에 매진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전문 21조의 민청련 규약을 통과시키고 임원진을 선출하였다. 12시 가까이 되어서야 창립대회가 끝났고 약속대로 김 의장을 비롯한 신임 집행부는 전원 연행되었다. 뒤에 남은 회원들은 의연하게 끌려가는 집행부를 전송하며 울분을 삭였다. 사실 김근태는 의장을 맡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 후배가 찾아와 “선배들은 어떻게 했기에 우리나라를 이 따위로 내버려 뒀느냐”라고 한 절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후 민청련은 눈부신 활동을 보여주었다. 민청련의 위상은 상도동과 동교동에 버금가는 민주화운동의 한 축이었다.

이 두 곳 외에도 김근태 의장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많다. 청춘을 보낸 경기고가 있었던 정독도서관, 마로니에 공원으로 바뀐 서울대 문리대, 민청련의 첫 둥지였던 파고다 빌딩, 서대문형무소, 국회의사당, 도봉구에 있는 지구당 사무실, 그의 장례식이 열린 명동성당, 마지막으로 그가 잠든 마석모란공원…

이제 대선이 열흘도 남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꿈은 실현될 것인가! 그의 1주기에 승전보를 전할 수 있을까? 오로지 남은 우리들의 몫이리라. 오는 12월 30일, 그를 기억해주시기 바란다. 민주주의자 김근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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