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늦봄 문익환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이 나라가 한국 역사 특히 현대사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한국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역사에도 적지 않은 무대를 제공한 나라이기도 하다. ‘김대중 납치사건’이 벌어진 곳도 도쿄가 아닌가! 하지만 1994년 1월 18일 세상을 떠난 문익환 목사만큼 일본에 많은 흔적을 남긴 민주인사도 드물다.

문익환 목사와 도쿄의 첫 인연은 1938년에 도쿄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사실 학교보다 유학 온 신학생들이 모임인 관동조선신학생회가 그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평생의 반려 박용길을 그 모임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이었다.


[마루노우치 빌딩가]


문익환 목사와 도쿄와의 두 번째 인연은 한국전쟁 때문에 시작되었다. 1949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32세의 문익환은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유엔군에 지원했고 그의 영어실력 덕분에 도쿄의 GHQ(Genaral Head Quarters)에서 통역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빨갱이 목사’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그의 경력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당시 그가 근무하던 곳은 도쿄역 바로 앞에 있는 마루노우치 빌딩이었다. 이 건물은 하나가 아닌 여러 동으로 이뤄져 있다. 그가 근무하던 부서는 정확히 말하면 ATIS(Allied Translation and Interpretation Section: 연합국 번역 통역 부서)였다.

마루노우치 빌딩은 1923년 미쓰비시 재벌에 의해 건설된 대규모 오피스 빌딩이었다. 미쓰비시 재벌은 군납과 해운업으로 일어났으니 대만과 만주, 조선침략이 그들의 성장기반 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범기업’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한국에서 많은 돈을 벌고 있으며 정부입찰조차도 척척 잘 따내고 있다. 이 건물이 세워질 때 많은 조선 유학생들이 노역을 하면 푼돈을 벌었다고 하니 우리 동포들의 땀이 베인 곳이기도 하다.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사령부로 사용된 이 건물은 1974년 적군파의 폭탄 테러 표적이 되어 8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나온 참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사진에서 보듯 옛 건물 뒤에 새 건물이 증축되어 있다. 이 건물은 문익환이 평생 동안 아끼던 후배이자 동지였으며 ATIS에서 같이 근무했던 정경모를 장가보낸 계기가 된 곳이기도 하다. 이 사연은 무척 재미있지만 여기에 모두 소개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부족한 게 아쉽다(문익환 평전 300-303쪽).

한국전쟁 시기는 한국인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였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문익환 집안에게는 가장 윤택한 시기였다. GHQ에서 많은 봉급을 달러로 받았고 미군이 제공한 승용차까지 있었다. 이 때 막내 문성근이 태어나기도 했다. 문익환은 미군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학교의 교장이 되어 손수 우리말 교과서를 만들어 미군들에게 가르치면서 새삼 한글의 아름다움과 과학성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언어 역시 ‘무기화’ 될 수밖에 없는 전시여서 그는 포로를 심문할 때 사용하는 말 위주로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문익환 평전 313-314쪽).

[한국어 학교 교장 시절, 앞 줄 가운데]    [도쿄역]



마루노우치 빌딩 바로 앞에는 도쿄역이 있다. 1914년, 암스테르담 역을 모델로 완공된 이 건물은 문익환에게 잊을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1940년, 박용길이 한국에서 여름성경학교에 쓸 교재와 자료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마중 나온 문익환을 보고 처음으로 호감을 느끼게 된 장소였기 때문이다(문익환 평전 204-205쪽). 이때부터 부부의 전설적인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인들이 도쿄 여행을 가면 반드시 가는 곳이 황거다. 물론 안에는 못가고 문과 해자, 성벽만 구경하지만 바로 황거 앞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가 있던 제일생명(다이이치 세이메이) 빌딩에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우리나라의 운명이 결정되었는데도 말이다. ATIS요원 문익환도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을 것이다. 이 건물은 위치상 황거를 내다볼 수 있으니 점령군 지휘소로는 적격인데, 맥아더 평전을 읽어보니 그는 일본에 있는 6년 동안 한 번도 일본 밖에서 잔 적이 없고, 한국‧대만‧필리핀에 가긴 했지만 모두 당일 돌아왔다고 한다. 한국에 대한 그의 애정은 이러했던 것이다. 이 건물은 1938년에 완공되었는데,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외벽을 화강암으로 마감하여 아주 육중하게 보인다. 이미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던 터라 철근은 전략물자로 취급되어 건설에 사용될 수 없었지만 이 건물은 유사시 황거 방위를 위한 시설로 활용하기 위해 철근 사용이 허가되었고 옥상은 폭격에도 견디도록 만들어졌다.

[제일생명 로비]



[제일생명 건물]


당시에는 앞의 석조 건물만 있었고 지금은 사진에서 보듯이 구관 뒤에 21층짜리 새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DN21타워로 불린다. 맥아더 집무실이 공개되었다고 해서 가보니 ‘특별경계’ 중이라는 아리송한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다. 아쉽게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만 맥아더가 만든 ‘평화 헌법’을 개정한다는 데 설마 그것 때문에? 라는 다소 ‘나간’ 생각도 들었다.


[메이지 생명 건물]


제일생명 빌딩 옆에는 그 보다 먼저 건설된 메이지 생명 건물도 있는데, 이 건물도 미군에게 접수되어 맥아더의 자문기관인 대일이사회(對日理事會)가 사용했다. 이 건물 역시 뒤에 신관이 지어져 있다.

제일생명 건물을 지나 조금만 걸으면 히비야(日比谷) 공원이 나온다. 1919년, 동경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한 후 2월 12일 조선독립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뿌리고 집회를 가졌던 곳이기도 하며,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의 국장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사건을 기념하는 비석 하나 없다. 의외로 필리핀의 독립영웅인 호세 리잘의 흉상이 한 구석에 서있다. 그가 이 근처 호텔에 머물었다고 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쨌든 60년 전 문익환도 박용길과 이곳에서 데이트를 하면서 망중한을 즐겼으리라.


신주쿠 니시와세다(西早稲田)에 있는 일본기독교회관은 문익환 목사가 1989년 방북 후 귀국 할 때 거점이었던 곳이다. 당시 일본NCC는 진정한 기독교인의 우정을 보여주며 문익환 목사의 방일 9일 동안 모든 업무를 전폐하고 그를 보살폈다. 특히 총간사 나카지마 목사와 마에지마 목사 등이 많은 수고를 하였다. 일본 체재 당시 문익환 목사는 일본 경찰로부터 거의 국빈급 경호를 받아 재일동포들에게 큰 자부심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정동교회를 연상하게 하는 빨간 벽돌의 교회 건물이 인상적이다(문익환 평전 738쪽 - 741쪽)



도쿄의 서점가이자 대학가인 간다(神田)에 가면 한국YMCA가 있다. 흔히들 2.8독립선언의 무대로 알고 있고 기념비와 기념공간도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당시 조선YMCA는 지금의 장소보다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관동 대지진 때 파괴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것이다. 원래의 장소는 빌딩이 들어서 전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어쨌든 이 곳 역시 문익환이 동경 유학시절이나 GHQ 근무 시절에 자주 들렸던 곳이리라. 지금 건물은 90년대에 다시 지어졌는데, 호텔 기능이 가장 크다. 한국스태프들이 있어 편리하니 도쿄에 가면 이 곳에 머물러도 좋겠다.



짧은 동경 취재를 끝내고 돌아오면서 보람도 컸지만 어디에도 문익환 목사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은 안타까웠다. 하기야 황거는 가면서 바로 옆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히비야 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뿌려졌는지도 모르는 우리들이니 그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이리라. 하지만 이제 해외에 있는 민주화 관련 유적들에도 우리의 손길이 닿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해외에서 자라는 교민들과 유학생들이 알고 관심을 가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