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공원 가는 아침, 바람이 불고 날이 몹시 추웠다. 아름다운 단풍에서 급격히 진갈색으로 사라지는 낙엽들이 여기저기 바람에 휩쓸리고 있었다. 여의도 공원은 쓸쓸했다. 예전에 그곳은 ‘여의도 광장’이었다. 끝이 아득했던 넓디넓은 공간이었다. 거기서 친구들이랑 자전거도 타고 그 옆 한강 갈대밭에서 사진도 찍었다. 대규모 공연이 벌어지는 곳이었고 몇 백만 명이 모여 자신의 의사를 표현 할 수 있는 넉넉한 모임과 소통의 공간이었다.
지난 1999년 정부는 그 넓은 공간에 나무를 심어버렸다. 서울 1천 5백만 명 뿐만 아니라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지방에 올라와 호소하던 사람들의 공간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나무들을 비집고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농민들에게 여의도 공원은 쓸쓸하고 아픈 곳이었다
 
“이제 농민들은 여의도 공원에 오는 것을 무서워해요.” 차가운 바람을 뚫고 더 매섭게 정재돈(53) 가톨릭 농민회(가농)회장의 이 말이 나에게 와서 박힌다.
2005년 11월 15일 시위를 하다가 여기 문화마당에서 농민 두 명이 기동대에게 맞아서 숨을 거두었다. 시위하던 농민들은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그런 노인들에게 일반 전경도 아니고 특수부대들이 폭력적인 진압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폭력적인 진압보다 더 무서운 것은 두 농민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인 침묵과 무관심이었다. 대부분의 많은 시민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안전을 위해 ‘농업의 죽음’을 원했던 것이다. ‘농업의 죽음’이 그들의 경제적 안전을 가져오리라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고 오히려 그들에게 재앙을 가져다주리라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오늘의 농민들이 여의도 공원에 얼굴 돌리기도 싫어하지만 1989년에는 그렇지 않았다. 1989년 2·13여의도 전국농민대회 때 여의도 광장은 하나의 큰 소통 공간이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열기를 투쟁으로 뿜어낼 수 있었다. 그 싸움은 농민 투쟁 중 가장 정점에 있었다. 2·13 투쟁의 영향으로 ‘전국농민회 총연맹’ 농민들의 단일한 조직이 만들어졌고 수세가 폐지되었다.

농민들은 수입개방농정 뿐만이 아니라 수세 때문에도 분노했다. 일제 때 농민들에게 부과했던 수세가 아직도 남아있었던 것이다. 1987년 11월 26일 전남 해남에서 처음으로 수세폐지 결의 대회가 열린 뒤 수세 폐지투쟁은 짧은 시기에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지역에서 벌어진 수많은 투쟁들

2월 13일, 여의도에서 있었던 ‘고추 전량수매 쟁취 및 수세폐지 전국농민대회’는 농민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전국에서 올라온 2만 여 명의 농민들이 하나가 된 날이었습니다. 전국 단위로 그렇게 많은 농민들이 독자적으로 모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상주시 농민회 회원이었던 전성도 씨(43세)가 말했다. 


2만 여 명 중 가톨릭 농민회, 기독교 농민회, 농민협회 회원은 10%도 안 되고 대부분 농민회원이 아닌 ‘보통 농민들’이었다. 전북 임실에서는 참가한 1천 1백 명 중 가농회원은 60~70명밖에 되지 않았다. 임실 가농회원들이 농민들을 이 대회에 참가시키기 위해 홍보물을 뿌렸을 때 너무 호응이 강해 홍보를 중단할 정도였다. 이렇게 평범한 농민들이 많이 참여하게 된 배경에는 ‘유사 이래 최대의 위기에 처한 농촌 현실’이 있었다. .
참여한 농민들은 대부분 영양, 상주, 청송, 안동 등 고추 농사를 짓던 경상도 중심의 농민과 수세로 고통을 당하던나주, 강진 등 전라도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전국에 걸쳐 각 지역에서 골고루 농민들이 참여했다. 그 당시 농수산물 수입 개방으로 농촌이 파탄 위기에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추였다. 정부에서 양담배를 수입하자 담배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고추로 작물을 바꾸어서 고추가 과잉 생산되고 값이 폭락하였던 것이다. 고추 한 근에 생산비는 2천 6백 원 정도 드는데 가격은 5백 원에 불과했다. 농민들은 정부의 정책에 분노했다. 

 



서울 시민들의 자유로운 여가 공간이기도 한 여의도. 1989년 당시에는 없던 전철이 들어섰다


1988년 8월 영양을 시작으로 봉화, 청송, 안동, 의성으로 고추투쟁이 퍼졌으며 충북 음성, 괴산, 전라도 임실까지 전국적으로 투쟁이 확산되었다. 39개 지역에서 5만여 명이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