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분도회관 1층에 있는 분도출판사는 베네딕도회가 문화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설립한 출판사다.
 
민통련은 결국 1987년 정권교체 국면으로 접어들면 전면적인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때 민통련이 지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안으로는 ‘군사독재퇴진 및 민주헌법쟁취위원회’를 설치하고, 밖으로는 정치권과의 공조를 도모하면서 정치투쟁에 힘을 실어나갔다. 1986년은 어느 때보다 반독재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해였고, 민통련은 그 열기를 이어가기 위해 양 김 씨와 민통련 간의 비상설 연락기구인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민국련)’를 구성해 개헌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신한민주당(신민당)은 국회 밖으로 나와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3월 11일 ‘개헌추진위원회 서울지부 결성대회’를 열었고, 5월 말까지 부산, 대구, 대전, 인천, 마산, 전주 등의 순서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개헌 현판식을 진행했다. 현판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동안 억눌려 온 민중들의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이 모처럼만에 생긴 합법적인 공간을 통해 분출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김세진, 이재호의 분신 사건이 일어난 후 민국련이 와해되고 민통련 지도부가 총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민국련은 양 김 씨의 의사대로 학생들의 반미·용공·과격 시위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것은 민통련의 입장과 기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으므로 민국련을 탈퇴하는 한편,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지도부가 총사퇴하겠다고 밝혔던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사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곧 다가오는 5월 3일 인천지역의 개헌 현판식에 맞춰 대규모 집회가 예정된 터라 지도부의 사퇴는 그 이후로 보류되었다가 5·3 인천사태의 배후 조종자로 민통련이 지목되어 문익환 의장과 장기표 정책실장이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날 인천시민회관 일대에는 3만여 명이 모여들었고, 대회 초반부터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민통련의 계획과는 달랐다.



수위실 안의 구조는 나무 목재로 리모델링이 거의 되지 않았음에도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민통련

그러는 동안 민통련은 제도권 정치세력과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을 총망라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국본을 통하여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여전히 명실상부한 민주화운동 조직으로서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6·29 선언 이후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고, 대선 전략을 두고 내홍을 겪으면서 사실상 분열되었다. 또한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을 공식적인 입장으로 결정하였으나, 결국 대선에서 패배함으로써 국민들의 신망을 잃기 시작했다. 그 후 1년여가 지난 1989년 1월에 해산하면서 민통련을 계승하여 전국적인 통합조직으로 출범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 종로3가 사무실을 넘겨주었다.
그렇게 민통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그곳에서 활동했던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터이다. 이명식 씨는 그 중에서도 특히 분도회관 시절의 민통련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전한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희망이 있었기에 열심히 일했고 많은 것을 배우게 해준 곳이었으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인터뷰를 마치자 그는 그 시절, 강연을 다녀온 어르신들이 고생한다며 강연료를 털어 맛있는 음식을 사주곤 했는데, 그 맛을 다시 느끼고 싶다며 나를 가까운 족발집으로 이끌었다.


글 류외향 |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1996년 대구 매일신문으로 등단,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와 『푸른 손들의 꽃밭』이 있다.

사진 황석선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