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사업회가 2008년 발간한『그날 그들은 그곳에서』(다시 가본 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에 실렸던 글입니다.> | ||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다니던 박종철이 당시 시국사건으로 수배중인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경찰에 의해 참고인으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이에 경찰은 서둘러 화장을 하고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 하였으나, 다음날 15일 석간신문에 사망 보도기사가 나가자 단순 쇼크에 의한 사망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최초로 사체를 검안한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 오연상이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제기하자, 경찰은 1월 19일 물고문으로 인한 질식사로 정정 발표하고 고문에 가담한 경찰 2명을 구속하면서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박종철의 연행 시간과 사망 경위, 고문에 가담한 경찰의 숫자 등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고문에 가담한 경찰이 3명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자, 3명의 경찰이 추가 구속되었으며 5월 29일에는 범인 축소 조작에 나섰던 박처원 치안감 등 4명이 범인도피죄로 구속되었다. 또한 박종철을 부검하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이 사건 발생 1년 후인 1988년 1월 12일 경찰이 자신을 회유하려했다고 폭로하면서 당시 치안본부장이었던 강민창이 직권남용과 직무유기혐의로 구속되었다. 2000년 12월에는 국가가 유족에게 지불한 손해배상금의 70%를 사건 가담 경찰이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고문이라는 잘못된 수사 관행에 대한 비판과 함께 경찰의 사건 은폐 등으로 우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1987년 6월민주항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 ||
- 박종철기념관 설명 중에서- 영원한 청년 박종철 | ||
고문으로 악명 높은 수사기관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가 대간첩 수사를 명목으로 만들었다. 한국 건축에서는 보기 드물게 검은색 벽돌을 사용한 이 건물은 다른 수사기관과 달리 지하실이 없고 조사실을 건물 5층에 배치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은 건물 뒤편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중간층을 거치지 않고 바로 5층 조사실로 올라갔는데, 이 통로는 반경이 채 1미터도 되지 않는 협소한 공간인데다 외부를 볼 수 있는 창문도 없이 곧바로 5층으로 이어져 있다. 박종철의 선배였던 박종운은 "이런 폐쇄적 구조는 피의자들에게 공포감을 주고 1~4층에 드나드는 어떤 인물도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5층에는 똑같은 구조의 ‘조사실’이 들어차 있는데 각 방은 4.09평 공간에 책상과 의자, 침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일부 방에는 욕조가 설치되어 있었다. 설치된 가구들은 끌려온 사람들의 자해를 방지하기 위해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각 방은 폭이 좁고 위아래로 긴 2개의 창문만 나 있어 비명소리 조차 새어나오기 어려웠다. 박종철의 고문사 이전에도 김근태 전 의원 등이 여러 사건을 통해 이곳에서 행해진 고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결국 한 젊은 생명이 스러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고문의 현장’이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과 관련해 조사받은 김근태는 이곳에서 행해진 고문을 법정진술을 통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기도 했다. | ||
김근태를 비롯한 수많은 인사들을 고문해 세칭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은 지난 1988년 퇴직 후 수배자로 10년 이상 도피생활을 하다 2000년 7년형을 선고 받고 만기 복역 후 출소하였다. 옥중에서 기독교를 접했다는 이근안은 출소 후 신학을 공부하며 전도사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간증집회를 가졌으며 최근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공간으로서의 대공분실이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모습을 바꿨듯이 그 안에서 고문을 행하던 사람도 영혼을 구원하는 일로 그 역할을 바꿨다. 이는 다만 역사적 우연일 뿐인가. 자못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
대표적인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대공분실 | ||
1968년에 대규모의 국가 건설기획을 담당하는 한국기술개발공사의 대표이사가 된 것이나 1981년 당시 새 주한 미대사 워커에게 광주학살의 주범인 허화평과 허삼수를 소개해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김수근이 독재자와 협력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특히, 당시에 일종의 경쟁자인 건축가 김중업이 독재정권과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7~8년 동안 프랑스로 추방당한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 강미노 <독재자 철학 구현한 건축가 김수근의 업적과 책임> 레디앙 2006. 6. 3 기사 중에서 | ||
달라진,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 ||
수많은 이들이 고문당하고 목숨을 잃기도 한 곳 남영동 대공분실이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변한 것은 분명 87년 6월민주항쟁 이후 진행된 한국 민주주의의 성과임에 틀림없다. 경찰청 소유의 건물에 박종철기념관이 들어선 것 또한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분명 한국사회는 20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출범한 진 얼마 되지도 않은 인권보호센터의 규모가 축소되고, 인권경찰로 거듭나겠다며 경찰청이 구성한 민간인권보호위원들이 집회참가자들에 대한 과잉 진압에 항의해 전원 사퇴한 현실 또한 오늘의 모습이다. 때문에 21년 전 박종철을 보내며 목울대를 울렸던 외침, 마침내 다가올 그날을 향한 뜨거운 열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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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1987년 1월 20일,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2층에서 거행된 박종철 군 추모제에서 박종철이 과회장으로 있던 인문대학 언어학과 학생들이 바친 추모시이다. 이 추모시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역에 있는 묘비와 서울대 교정에 세워진 추모비에도 새겨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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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종철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장 사진 황석선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