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10월 1일 새벽 5시, 서울 대림동 원풍모방 제 1공장이 폭풍전야의 적막에 휩싸였다.
노조 파괴 책동에 맞서 닷새째 단식농성 중이던 600여 조합원들은 긴장된 눈빛을 빠르게 교환했다.
‘삐이익!’
날카로운호루라기소리를신호로700여명의구사대와사복경찰이농성장에들이닥쳤다.
“끌어내!”
 

 
농성장은 삽시간에 전쟁터로 변했다. 조합원들은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야수처럼 달려드는 저들의 몽둥이와 발길질을 당해낼 수 없었다.
머리가 깨지고 입술이 터지고 옷이 찢긴채 공장 밖으로 내몰린 조합원들은 교통이 차단된 대림동 6차선도로에 내동댕이쳐졌다.
마침 그날은 추석이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보름달이 그네들의 차가운 맨발과, 점점이 떨어진 붉은 피와, 육교 난간에서 펄럭이는 고딕체 선! 진! 조! 국! 창조 위에 시리도록 파란 빛을 내쏘고 있었다.
이로써 강철 같은 단결과 조직력을 자랑하던‘원풍모방’은 청계피복·반도상사·서통·콘트롤데이타의 뒤를 이어 1970년대 마지막 민주노조의 깃발을 내리게 됐다. 원풍의 투쟁 소식을 들은 조지송 목사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원풍(怨風)아 불어라!”
‘원풍(元豊)의 한을 원풍(怨風)의 바람으로 날려 버릴 때 까지 우리들의 행진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원한의 바람을 태풍처럼 일으켜야 합니다. 그래야지요.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하고 비겁하고 흉악스러운 것들일랑 원풍(怨風)으로 송두리째 몽땅 그루터기도 남지 못하도록 날려 보내야 합니다. 그리하여 새 터, 깨끗한 터, 거룩한 터에 새 집을 짓고 좋은 일, 옳은 일을 마음놓고 하며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뒤, ‘원풍(怨風)의 바 람’을 일으켜 노동운동의‘거룩한 터’를 만자는 조목사의 말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1984년 1월 6일 노동운동의 주체성, 통일성, 연대성을 기치로, 800만 노동자의 대변자 한국 노동자복지협의회(이하 한노협)가 결성된 것이다. 이 한노협의 산실이었던 신길동 삼호연립101호는 1982년 원풍모방 노조가 강제해산 될 당시 남아 있던 4천여 만 원의 조합비를 종자돈으로 해서 마련한 것이었다.


 
신길동 삼호연립 101호
 

 
서울 영등포역에서 신길동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우신초등학교 사거리가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허름한 동네다. 사거리 우측 모퉁이에 자리잡은 고박사칼국수집을 끼고 살짝 돌면 높은 축대 위쪽으로 통하는 수십 개의 돌계단이 있다. 그 돌계단을 올라가면 지은 지 20년은 넘은 듯한 우중충한 연립주택이 나타난다. 삼호 연립 101호.‘ 신길동 101호’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진‘한노협’사무실이다.
“신축 연립에 첫 입주를 한 것이었어요. 당시로선 상당히 고급스런 집이었죠. 이 동네가 그때는 상상하기 힘든 달동네였거든요. 그런 동네에 이 연립이 들어서니까, 뭐랄까, 빈부의 격차가 진다고 해야 되나? 이게 거의 빌딩처럼 보였어요.”
한노협 창립멤버이자 원풍모방노동조합 지부장을 지낸 정선순 (사)녹색환경운동 이사(52세)의 말이다.
“좋았지, 뭐. 우리 같은 노동자들이 언제 이런 데서 살아봤겠어요?”
최연봉(전 인천지부장, 53세)·강석순(전 교육부장, 49세)·박혜현(홍보실 간사, 42세) 등 왕년의 한노협 멤버들이 옆에서 정이사의 말을 거든다. 32평쯤 되는 사무실 내부는 방 세 칸에 주방과 거실, 화장실이 용도별로 잘 구획돼 있어 인근 노동자들이 퇴근 후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식사도 하고 편하게 상담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안성맞춤이다. 또 별도로 지하실까지 딸려 있어 오갈 데 없는 해고자들이나 노동운동가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아지트였다.
“그때는 운동단체가 툭하면 털리고 그랬잖아요. 사무실 문 따고 들어가서 집기며 서류며다 뒤집어놓고 그런 일이 다반사였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일반 주택이라 경찰이 주변에서 감시는 해도, 집안에 맘대로 들어와서 뒤지지는 못하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이런 주택을 구해 입주한 거예요.”

 
일반 주택처럼 편안한 공간적 특성으로 인해 이곳은 여러 운동단체들의 밤샘회의나 MT장소로 애용되는 명소였다. 민청련·민통련·전노협·전농 등 저 80년대‘民’자 ‘全’자 들어가는 단체에서 활동한 사람치고 이 집에서 밥 한 끼 술 한 잔 얻어먹지 않은 사람 드물다. 특별한 행사가 있어 지역에서 사람들이 많이 올라올 때도 어김없이 최종 귀착지는‘신길동 101호’
“1984년엔 민청련, 85년부터는 민통련에서 많이들 오셨죠. 한노협이 민통련의 가맹단 체고, 이창복 선생 등 민통련 선배들 중에 한노협 지도위원이 많았기 때문에 한식구라는 생각이 강했어요.

 
 
문익환 목사님을 비롯해서 김근태·임채정·이해찬 씨 등 아마 이 집에서 하룻밤 자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수배자들도 여럿 거쳐 갔다. 정선순 이사는 그 중에서도 단병호 전노협 전 위원장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그 양반이 키가 엄청 크시잖아요. 어디 가도 사람들 눈에 확 띄니까 쉽게 움직일 수가 없는 거죠. 서울에 무슨 일이 있으면 이틀 전에 미리 이 집으로 오셔요. 바깥에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딱 움직이는 거죠.”
그러고 보니 사무실 책장 위에 지난 2005년 민통련 창립 20주년 행사에서 받은 감사패가 놓여 있다.
‘귀 단체는 지난 1985년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 창립된 민통련 활동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을 무릅쓰고 물심양면으로 함께해 주었습니다. 신길동 101호 노협 사무실은 민통련 회원들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한노협의 동자복지협의회
 
한노협의 활동과 분화 과정을 이해하려면 창립 배경을 알아야 한다. 첫째가 블랙리스트철폐운동이다. 민주노조의 마지막 보루였던 원풍이 무너지자 이 나라 노동운동계는 일시에 적막강산이 되었다. 모든 것은‘노동운동의씨를 말리겠다’는 전두환 정권의 공언대로 돼 가는 듯이 보였다.
전두환 정권은 해고자들이 현장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전국의 사업장에 재취업 금지 블랙리스트를 돌렸다. 그러나 1983년 12월에 발견된 1천여 명의 블랙리스트는 삶의 벼랑 끝에 선 해고노동자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인천과 이리(현재 익산) 지역의 해고자들이 블랙리스트철폐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 치열성과 완강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투쟁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폭압적인 정치권력과의 싸움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건 투쟁의 지속성을 담보할 조직임을 절감케 한 사건이었다.
또 하나의 주된 배경은‘고자 모임’이었다. 해고자

 
모임에서‘해’자를 뺀 이 기상천외한 이름의 모임은 원풍·동일·반도·청계피복·서통·YH·콘트롤데이타·고려피혁·한일도루코 등 1970년대 민주노조 핵심 간부들과 김문수 경기도지사 같은 학생 출신 현장 취업자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은 변두리 중국집, 관악산 등지를 돌며 은밀한 모임을 가졌다. 고립분산적인 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평가와 반성에서 출발한 이들의 논의는 민주노조 건설과 노동운동의 통일적 발판을 구축하기 위한‘노동단체 결성’ 문제로 귀착했고, 그것은 곧 한노협 결성으로 이어졌다.
“노동자들이 한국노총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단위 노조 차원을 뛰어넘는 제도권 밖의 조직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노협 결성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84년 3월 10일 한노협을연대틀로 해서 다른 민주세력, 민중세력과의 연대투쟁을 이끌어내겠다는 큰 뜻으로 홍제 동성당에서 창립대회를 했지요. 방용석(원풍)·김문수(한일도루코)·이총각(동일방직)· 최순영(YH)·이영순(콘트롤데이타) 같은 선배들을 중심으로 진용을 짜고 노동법개정운동이 전개됐고, 기관지『민주노동』을 만들어 선전·홍보 작업에도 주력했지요. 일반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임금체불·퇴직금·산업재해·부당노동행위 상담, 신규노동조합과 노동자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사업이 특히 반응이 좋았어요.”(정선순) 한노협의 교육 사업은 전국의 노조에서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거제·제주·진주·이리·안산 등 연간 1백여 차례의 교육이 실시되었다. 전국 노동조합에 대한 실무·교육·상담·자료 등의 지원이 진행되면서 조직은 더욱 강화되어 1985년 인천노협, 1987년 동부노련, 1987년 남부노련 등 창립 4년 만에 지역지부를 3개나 건설했다. 특히 인천노협은 만도·대흥·한독·남일·콜트악기 등 67개 신규조직 결성을 지원했고, 이 성과는 그대로 인천노협의 근간이 되었다.

 
분열과 갈등을 딛고서
 
그러나 외형적인 성과에 자족할 때가 아니었다. 70년대 노동운동을‘경제투쟁에 머문 실패한 운동’으로 규정한‘노방(노동운동의 방향정립을 위하여)’이란 문건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한노협 내부에도 심각한 균열의 징후가 나타났다.
“70년대 노조가 혼자 살겠다고 자기 조직만 끼고 있다가 각개격파 당했다고 평가절하하는가 하면, 노조무용론을 들고 나오는 거예요. 김문수 씨 같은 경우는 노동자들 집회에 나와서 공공연히‘혁명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현장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죠. 노동자들의 현실은 이만큼인데 이 힘 갖고 무슨 혁명을 하냐……. 그런 이론적 갈등이나 노선의 차이가 현장 안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노동조합이 갈라졌단 말이에요.
학생 출신이 현장에 들어와서 일정한 역할을 한 건 사실이지만, 책에서 얻은 이론을 현장에 접목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어요. 같이 해고당해서 복직투쟁 하잖아요? 가보면 학생 출신은 없어. 노동자들만 악악대고 싸우는 거야. 학생들은 뒤에 앉아서 지시하는 거죠.‘ 가서 투쟁해라’,‘ 갔다 오면 평가해’,‘ 넌 개량주의’. 이런 모습들을 너무나 많이 봐 왔어요. 그들 중에 국회로 간 사람도 많은데 다 자기정당화하고 잘한 부분만 부각하지 과거 활동에 대한 반성이 없어. 민주노동당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노동자들한테 제대로 지지를 못 받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최연봉)
1985년 8월 서노련이 결성되자 그에 동조한 세력이 대거 한노협을 이탈해 나갔다. 이제 한노협에 남은 것은‘경제주의자’와‘조합주의자’들뿐이었다. 그들은 상처 난 가슴을 달래며 87년 노동자대투쟁의

 

 
고지를 향해 일떠서는 노동운동을 풀무질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1989년 1월, 비약적으로 성장한 노동운동이 전노협 건설을 추진하자 한노협은‘진보적인 노동운동의 한 부분으로서 겸허하게 복무할 것을 결의’한 후 한국민주노동자연합(한노련)으로 이름을 바꿨다. 외곽 공개조직으로서 전국 사업장의 조직 관리와 실무역량 강화를 위한 지원 활동에 힘쓰던 한노협은 1997년 3월 자신의 역사적 소임이 다했음을 깨닫고 발전적 해소를 했다.
1980년대 재야운동권의 사랑방이었던‘신길동 101호’는 2008년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제 중년이 된 한노협 멤버들은‘녹색환경운동’이라는 새로운 생활환경운동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어려운 시절, 단위노조의 한계를 뛰어넘어 연대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이들의 공력이 어디에 다다를지 애정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글. 김기선 | 1965년 서울 출생. 평전 작가. 저서로는『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전태일』, 『김진수』, 『최종길』, 『한일회담 반대운동』등이 있다.
사진. 황석선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