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산 옛 안기부청사 – ‘국치의 길’ 너머 ‘인권의 길’까지

글. 사진 권기봉  (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전세계 어디를 가도 서울처럼 도시 한 복판에 산을 두고 있는 수도는 극히 드물다. 지금이야 서울의 지리적 한복판에 위치한 듯 하지만, 애당초 ‘남산’은 서울의 남쪽 경계에 불과했던 것이 지난 1969년 한남대교가 놓이고 70년대 들어 도시가 확장되면서 서울의 지리적 중심이 되었다.

허나 남산은 지리적 위치와는 상관 없이, 조선시대 이후 서울의 다른 어떤 산보다도 한반도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 건국의 주요인물을 기리기 위한 ‘국사당’이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국가의 안녕을 위한 제를 올리기 위해 국사당을 세우는 등, 남산에 정신적인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국사당이 있던 자리에 ‘조선신궁’을 설치한 것이다. 일제가 강요했던 ‘신사참배’의 가장 상징적인 공간을 남산에 만들었다. 당시 4대문 안이라면 어디에서도 보일 뿐만 아니라 국사당도 있었기에, 일제는 더더욱 남산을 그대로 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세운 조선신궁은 신사 중에서도 격이 가장 높은 신사로서, 일본 천황의 시조라 여기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근대 일본을 이끈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삼고 있었다. 제신이 갖는 의미 못지 않게 그 규모도 엄청났는데, 지금의 힐튼호텔 뒤 놀이터에서부터 안중근의사기념관과 남산식물원 터를 아우르는 43만 제곱미터의 광대한 면적을 자랑했다. 다만 그 흔적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지난 2005년 방영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삼순이 계단’으로 등장한 돌계단이 거의 유일하다.

조선신궁 유구는 아니지만,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당시를 증언하는 유물이 남아 있기는 하다. 노란색 외벽이 독특한 리라초등학교 뒤에 자리잡은 ‘사회복지법인 남산원’이 바로 그 현장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뤼순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러일전쟁의 승기를 거머줜 노기 마레스케 장군을 기리는 ‘노기신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최근 서울시가 이 루트를 따라 이른바 ‘국치의 길’을 조성했다. 조선이란 국가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즉 ‘조약’을 통해 망해가는 과정을 되짚어 봄으로써 어제를 통해 오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시도다. 특히 노기신사가 있던 곳에 자리한 남산원 본관과 별관은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일대를 국치의 길로만 걷기에는 부족하다. 이 길은 인권 유린의 길이기도 했으며, 그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투쟁한 이들의 역사가 서려있는 저항의 길, 인권의 길이기도 해서다. 실제로 노기신사 터에서 명동 방향으로 좀더 걸으면 현재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자리한 옛 조선총독부 청사 터를 지나 한국적십자사 빌딩에 닿게 되는데, 이곳부터는 비로소 ‘인권의 길’이 시작된다.

남산은 해방 뒤 군사독재정권이 낙점한 공간이기도 했다. 시민들에게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기억되는 남산은, 사실 지난 1995년까지만 해도 고문을 서슴지 않던 국가안전기획부 이른바 안기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서울유스호스텔로 사용되고 있는 옛 중앙정보부, 이후 안기부로 이름을 바꾼 기관의 여러 빌딩을 비롯해 문학의 집으로 쓰이고 있는 안기부장 공관 등 적지 않은 시설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 인권유린의 역사를 담담하게 증언하고 있다.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소장이 ‘국가 안전보장에 관련되는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죄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부 정보수사 활동을 조정 감독하기 위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에 설치했던 중앙정보부. 그것이 처음 세워진 곳은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들어서 있는 서울 석관동 산1-5번지 의릉 주변이었다.

1980년 역시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권 들어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라고 이름만 바꾼 채 계속해서 정권의 번견을 자임한 중앙정보부. 얼마나 고문이 심했으면 ‘육국(肉局)’이라고까지 불렸을까. 중앙정보부 내에서도 국내정치 사찰 담당 ‘6국’이 있던 곳은 지금은 서울유스호스텔 등으로 변한 중구 예장동 산4-5번지 일대다. 건물들은 1972년 12월 들어섰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 관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옛 안기부 본관은 겉모습만 놓고 보면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지하로 내려가면 이 건물의 과거를 보여주는 구조물을 맞닥뜨리게 된다. 1백여 미터 떨어진 지하시설물과 이어져 있는 지하통로인데, 통로를 따라가면 서울종합방재센터 상황실에 닿게 된다. 안기부가 내곡동으로 옮겨갈 당시 남아있던 건물 41개 동 가운데 하나로, 지하 수감시설이 있던 곳이다. 심지어 남산 1호 터널 근처로 연결되는 지하 대피로까지 남아있다. 방재센터는 누구라도 신청만 하면 들어가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커다란 전광판과 모니터들이 차지하고 있을 뿐 비명 서린 과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인양 옛 현장은 말 없는 공간으로서만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다.

1991년 안기부라는 이름을 국가정보원으로 바꾸며 쇄신의 노력을 보인 이후 ‘국가안전보장’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된 인권유린은 상당히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땅에 수십 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하며 생지옥을 연출했던 ‘남산’의 과거가 말끔히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한 번 낙인찍힌 자는 고문이 끝나도, 교도소를 나와도 ‘좌경용공’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다녀야 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지금도 ‘보안관찰처분’을 받아야 하는 처지라 주기적으로 ‘나 조용히 잘 살고 있다’고 보고해야 하는 등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심지어 반인륜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한다는 관례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나 한국에서만은 예외였다.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뒤 안기부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고소고발이 있었으나,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던 ‘이름 없는 수사관’들은 묵묵부답이었고 사법당국 역시 소극적일 뿐이었다.

이 겨울, 다시 남산 안기부 터를 찾았다. 십수 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건물 골격은 그대로였지만, 바깥벽은 마치 과거의 어두운 기억은 잊고 싶다는 듯 투명 유리로 바뀌어 있었다. 중학생 또래로 보이는 친구들이 건물 마당에서 공놀이를 하는 등 분위기도 훨씬 자유로워 보였다. 2006년 2월 서울시가 리모델링을 거쳐 서울유스호스텔로 문을 연 것이다.

사실 서울시가 옛 안기부 본관을 유스호스텔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기 전부터, 이곳을 인권기념관이나 민주주의기념관 등으로 조성하자는 제안이 있던 것이 사실이다. 옛 안기부 건물은 민주화의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이자 독재 권력의 상징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또 민주화라는 것이 그것을 직접 경험한 세대에게는 ‘가까운 과거’지만, 나와 같은 젊은 세대에게는 책에서나 읽을 수 있는 ‘먼 과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이곳은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성이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는 안기부는커녕 인권이나 민주주의와 관련한 어떠한 시설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옛 안기부터를 포함한 남산이 녹지로 묶여 있기 때문에 도시공원법에 따라 다른 용도로 이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드디어 지난 2017년 가을, 시대 변화와 함께 비로소 옛 과거를 돌아보며 인권의 소중함, 살아있는 민주주의 힘을 느낄 수 있도록, 이 일대에, 이름하여 ‘인권의 길’이 마련되었다. 특히 미래세대에게 그 가치를 전수하고자 옛 안기부 본관이었던 현 서울유스호스텔, 안기부장 관사였던 문학의 집 서울, 각종 조사실 등으로 쓰였던 현 서울종합방재센터와 서울소방재난본부 등은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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