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은 3월 15일 마산에서 시작되었지만, 서울에서의 대규모 시위가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의 4.19혁명 올레길은 시위가 결의되고 실행되기까지의 과정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코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승만 하야에 결정적 역할을 한 교수단 모임 장소,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저, 4.19의 대표적 시인 김수영의 옛 집터, 시위가 벌어지고 학생과 시민들이 쓰러진 주요 장소, 하야를 권유한 미국대사관, 당시 4.19 학살의 주범들이 처단된 법원 등을 둘러보게 됩니다. 



우리가 무심코 찾는 마로니에 공원, 종로와 을지로, 서울시의회가 있는 태평로, 덕수궁 돌담길이 바로 4.19혁명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들입니다. 




사적 278호로 지정된 옛 서울대 본관은 현재 문예진흥원이 사용


서울대 문리대 터 기념비





4.19 혁명 당시 서울시청 앞으로 하나 둘씩 집결하고 있는 시민들





□ 4.19민주올레 유적 설명



수유리 4.19 국립묘지 



4.19 혁명 다음 해인 1961년 2월 1일, 국무회의에서 수유리에 4.19 희생자들의 유해를 모실 공원묘지의 설립을 결의했고, 5.16 군사정변 이후 재건 국민운동 중앙본부가 부정 축재자의 재산인 서울 도봉구 수유동 산 9의 1 일대를 환수하여, 1962년 12월 21일 첫 삽을 뜨고 1만 2백 43평의 묘역을 가꾸어, 1963년 9월 20일, 185위의 희생자들을 안장했다. 이후 부상자 중의 사망자와 유공자 중의 사망자 115위가 추가되어 현재는 300위가 모셔져 있다. 주요 시설로는 유영봉안소, 기념탑과 분향소, 수호자 상, 기념비, 기념관등이 있다.  

 



4월 학생 혁명탑 비문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의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정의에 항쟁한 수 만명 학생 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

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제단의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피어나리라. 

 



4.19국립묘지



미아리고개


한성여중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진영숙(1946년 5월 15일~1960년 4월 19일) 양은 오후 10시 30분 미아리고개에서 시위 중 총탄에 희생된다. 같은 날, 해동상업학원 재학 중이던 김현기(20남)열사가 4월 19일 미아리고개 시위 중 총탄에 희생된다. 


진영숙 양이 죽기 4시간 전에 어머니에게 쓴 유서같은 편지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지금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희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수유리에 모셔져 있는 진영숙 열사의 묘 









□ 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