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팀은 대한민국에 있는 3대 민주화 운동의 성지를 방문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전체적인 경로는 서울에서 시작해서 기차를 타고 내려가며 광주에서 끝나는 3박 4일의 일정이었다.

 

세부 일정은

 

8월 6일: 서울(이한열 열사 기념관, 남영동 대공분실, 4.19 민주묘지)

8월 7일: 청주(4.19 기념탑)-익산(4.19 기념탑)

8월 8일: 광주(전남대, 윤상원 열사 생가, 구 전남도청, 5.18 국립묘지)

8월 9일: 광주(광주 구 505보안 부대, 광주 공원 광장)

 

다음과 같았다.

 

첫째 날에는 가장 먼저 6월 민주항쟁 발발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 열사 기념관을 방문했다.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당시 열사가 입었던 옷과 유품들을 보면서, 우리 또래를 이렇게 잔인하게 사살한 당시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또 불의에 항거하는 그 행동력이 존경스러웠다. 이러한 분들의 희생을 통해 내가 지금의 일상을 누릴 수 있어서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다음은 남영동 대공분실로 향했다. 현재 경찰청 인권센터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곳으로 민주화 인사들을 잡아 고문하던 장소였다. 이곳에는 6월 민주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박종철 열사 고문 치사사건이 발생한 곳이었다. 열사를 고문했던 고문실이 개방되어 있었는데, 당시 사용하던 침대와 가구들이 그대로 있었다. 다른 방은 공개되어 있지 않았는데 문들이 모두 똑같은 색이었다. 우리가 의아한 얼굴로 문들을 쳐다보자, 안내해주시는 분께서 방에 갇힌 사람이 혹시 탈출 했을 경우 어디가 출구인지 모르게 하도록 이렇게 칠해놓은 것이라는 설명을 해주셨다. 그 말을 들으니 꼭 이곳에 갇혀서 심문을 받은 사람들을 마치 정말 범죄자처럼 대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헌법에 반하는 행동을 한 사람은 그들이 아닌데 말이다. 또 아래층에 있는 박종철 열사 기념관도 함께 둘러 볼 수 있었다. 열사의 유품과 함께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들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한 장 한 장 읽어보니 누나의 재수를 걱정하는 평범한 동생의 모습이 있었다. 이한열 열사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마지막으로 수유에 있는 4.19 민주묘지에 방문했다. 4.19혁명 당시 돌아가신 희생자들의 영령을 모신 곳이다. 평소에도 묘역에 갈 때면 더 엄숙한 마음이 들었다. 이곳은 혁명의 희생자들이 계신 장소라 그런지 그 엄숙함과 무거움이 배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둘째 날에는 기차를 타고 청주로 내려왔다. 4.19 혁명 기념탑을 보기 위해서였다. 혁명 탑은 공원 중간에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다. 기념탑 위에는 생생한 사람들의 표정을 담은 부조가 있었다. 이 도시에서도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 기차를 타고 익산으로 내려갔다. 청주와 마찬가지로 4.19 기념탑을 보기 위해서였다. 청주에서는 기념탑까지 버스로 한 시간 정도 이동했지만, 익산은 역 앞 광장에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었다. 익산에 있는 기념탑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4.19혁명이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운동이 아니라 전국에서 일어났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셋째 날과 넷째 날은 모두 광주에서 할애하였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대한민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도시가 광주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먼저 광주 전남대를 방문하였다. 전남대는 5.18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곳이다. 우리가 전남대를 방문했을 때, 학생들이 수업을 듣기 위해 정문을 들어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전남대 정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전남대 앞에 거리를 바라보았다. 학생들을 위한 음식점과 술집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1980년 5월, 전남대 학생들이 정문을 나오면서 바라본 것은 탱크와 무장한 계엄군들이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다시 한 번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분노가 일었고, 먼저 가신 분들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은 윤상원열사 생가에 방문했다. 윤상원 열사는 몇 년 전에 큰 이슈가 되었던 화려한 휴가에서 김상경 역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윤상원 열사 생가는 광주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가족이 거주하면서 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한 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도착한 생가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없어도 들어와 보고 가라는 안내말을 발견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 열사의 생가는 단촐하고 소박했다. 현재도 사람이 살고 있어서 그런지 다른 생가보다 더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구 전남도청은 계엄군에 대한 시민군의 마지막 항전의 장소였다. 화려한 휴가 때문에 전남도청을 떠올리면 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했을 때의 도청은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멀리서 도청을 봐야 했는데, 계엄군의 총으로 인한 흔적이 남은 외벽과 깨진 창들이 얼핏얼핏 보였다. 전남도청 주변에 형성된 번화가와 폐허가 된 구 전남도청의 모습을 동시에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5.18국립묘지에 갔다. 겨울에도 한 번 왔었는데 폐장시간 무렵에 도착해서 기념관까지 전부 둘러보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일부러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와서 묘지와 기념관까지 전부 둘러볼 수 있었다. 기념관 안에 당시의 상황을 재연해놓은 비디오와 모형들이 있어서 그 때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 계단 벽에는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남긴 편지가 있었는데, 하나하나 읽다보니 가족들의 그리움과 슬픔이 느껴지는 것 같아 코끝이 찡해졌다. 마지막으로 1층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짧은 다큐멘터리를 감상했는데, 보는 내내 신군부가 이 평범한 시민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는지가 다시 한 번 피부로 느껴졌다.

 

넷째 날에는 제일 먼저 구 505보안부대로 향했다. 구 505보안부대는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을 체포하고 그들에게 고문화 폭력을 자행한 장소이다. 지금은 군사관리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때문에 주변에서 봐야했는데, 이곳을 보면서 남영동 대공분실이 생각났다. 다음으로 광주 공원광장에 갔다. 광주 공원 광장은 민주화 운동 당시에 시민군의 치안업무를 담당한 장소였으며, 시민군이 편성되었을 때는 사격술 훈련도 이루어진 곳이었다. 이곳은 금남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관심도가 낮은 곳이다. 실제로 우리가 도착했을 때, 정자에서 쉬고 계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몇 분만 계셨다. 4일 동안 많은 도시와 기념지를 둘러보면서 총과 칼이라는 힘 아래에서 자유라는 당연한 권리를 바란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갔는가를 생각하니 마음 한 쪽이 씁쓸해졌다. 또 이분들의 피와 눈물이 아니었다면, 지금 일상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 깊이 감사하게 되고 현재를 더 사랑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