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행동하는 양심


 저희는 부산 민주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저희는 네 명의 팀원 모두가 부산 토박이들이었지만 이 곳 민주공원을 방문해 본 팀원은 ‘최지원 팀원 뿐이라는 사실에 매우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희가 부산에 위치한 역사적인 공간들을 얼마나 관심가지지 않았는지 반성하고 부산의 민중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또 그렇기에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도록 부산시민으로써 노력해 보자는 다짐과 함께 이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부산 중구 영주동에 위치한 부산 민주공원은 들어서는 길에 커다란 돌 비석이 저희를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마을의 어르신들과 가족들이 커다란 나무아래서 정답게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곳 부산 민주 공원은 한국 근현대사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4.19 혁명과 부마 민주항쟁의 주역이었던 부산 시민의 숭고한 민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간입니다. 하지만 부마 항쟁은 6월 민주항쟁에 비해 비교적 규모도 작고 피해도 적었기 때문에 이 곳을 본거지로 두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인식이 적은 편입니다. 부산은 예로부터 보수적 성향이 짙은 도시이기도 하고 수도권 지역과는 상대적으로 물리적 거리가 있는 편이라 부산 지역의 저항운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항쟁의 불길은 더욱 커졌고 결국 이를 무마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유신정권이 막을 내립니다.

 민주공원에서 민주 항쟁 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길에 보인 기념탑입니다저희는이 탑을 배경으로 저희 깃발 팔랑이와 함께 인증샷도 남겨보았습니다.

 민주항쟁기념관 늘펼쳐보임방(상설전시실)에 들어섬과 동시에 마주하는 문구는 헌법 제 1조 1항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 문구를 읽으면서 저희는 탐방의 시작부터 민주주의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길 수 있었습니다. 이 당연한 말이 당연하지 않은 순간이 있었고, 그 당연하지 않은 순간을 바로 새우기 위해 수많은 희생이 있었음을 말입니다.

 옆으로는 부산 내 민주화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들을 나열한 지도를 볼 수도 있었습니다. 평소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곳들이 민주화운동의 산실이었음을 알게 되어 무척이나 낯설었습니다. 저희 네 명은 앞으로도 그 길을 지나갈 때면 이 기억을 떠올릴 듯 합니다.

 조금 안쪽으로 들어갔더니 일제강점기부터 독재정권까지 사람들의 의지를 꺾기 위한 탄압의 도구로써 사용된 ‘감옥’이 있었습니다. 직접 체험해본 이 공간은 겨우 사람 한명이 눕기에도 비좁은 공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감옥이라는 공간이 주는 그 답답함에, 직접 감옥문을 열어 나올 수 있는 걸 알면서도 이루어 말할 수 없이 공포스러웠습니다.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벌을 받기 위해 들어가야 하는 곳에 이토록 국가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어야 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탐방을 마쳐 갈 때쯤 민주주의와 관련된 테스트도 해보았습니다. 100점 만점에 60점, 안다고 생각한 문제였지만 잘못 알고 있거나 분명 배운 적이 있지만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 문제들 덕에 저희의 점수는 형편없었습니다. 부끄러운 점수였지만 더 열심히 공부해 다음에는 꼭100점을 맞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양한 부산 민주항쟁의 기록들을 살펴본 후 저희는 이 곳에 저희의 탐방 느낌을 기록하였습니다.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또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는 그런 민주시민으로서 살아감을 저희는 한 번 더 다짐하였습니다. 덧 붙여 저희는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도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노력도 민주주의의 모습이라는 메세지를 받으며, 민주주의는 정치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 내 삶의 모든 순간에 스스로 주인의식을 갖는 것”임을 명심했습니다.

 두 번째로기획전시실에서 진행한 작가 이승곤 님의 만평전을 관람하였습니다반미자주의식을 강조하신 신념이 작품속에 돋보였고민주화 운동 당시연행되는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기억에 남습니다만평전을 관람하며 예술도 하나의 사회적 행위가될 수 있음에 저희 모두 공감하였던 시간이었습니다.

 이 곳을 떠나며 저희는 이 곳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저희의 깃발을 든 인증샷을 여러 장 남겼습니다이 곳에서 더욱 오랫동안 천천히 둘러보고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일정을 고려하여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갔습니다.

 저희는 광주 동구 금남로에 위치한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다녀왔습니다

 광주에는 1980 5 18일에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기리고 알리기 위해 많은 기념관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이 중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에는 세계기록유산을 영구보존하고체계적으로 수집하며 역사적 의미를 세계인들과 공유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저희는 9시 오픈과 동시에 입장해 광주시민들의 숭고한 순간들을 사진으로기록으로기억으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삼일째 일정에 이른 시간이었지만광주시민들의 이야기에 피곤함도 잊은 채 관람에 몰두하였습니다.


 1층 1전시실에는 `항쟁(Struggle)`을 주제로 하여 5월의 항쟁을 영상, 음향, 전시연출, 조명 등으로 사실감 있게 재현해 놓았습니다. 벽면에는 일자 별로 그날의 잔혹한 참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운김 팀은 먼저 해설 없이 관람을 마친 후 시간이 허락해주어 해설가님께 해설을 부탁했습니다. 보통 해설 없이 관람만 하거나, 해설과 함께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렇게 선 관람 후 해설을 들으니 오히려 저희가 갖고 있던 의문과 빈틈을 문장화할 수 있었습니다.

 해설가님의 설명으로 새롭게 채워졌던 빈틈은 첫 번째로, 5월 18일이 되기 전에 이미 신현확(당시 대통령)과 전두환의 퇴진을 요구하는 평화적 시위가 전국규모로 일어났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정부가 대독을 통해 ‘민주국가’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를 기해 시위를 해산하자는 측과 끝까지 밀고 나가자는 입장이 갈라섰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 주의 주말은 여느 때와 달리 아주 조용하고 평화롭게 지나가는 듯 했습니다. 아마 그것이 폭풍전야였을까요? 약속과 달리 5월 17일, 장군 전두환은 기습적인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18일 광주의 항쟁은 계획적인 퇴진 시위와는 대별되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채웠던 빈틈은, ‘광주가 그리고 광주사람들이 유달리 정치색이 강하고 거칠어서 광주항쟁이 일어난 걸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가 은연중에 갖고 있던 선입견이기도 했습니다. 해설가 분은 그런 일이(쿠데타) 부산에서 일어났어도, 서울에서 일어났어도 상황은 비슷했을 것이고 시민들은 들고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의 요지는 광주사람들의 성향이 아니라 정부가 광주를 타겟으로 삼아 또다시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는 데 있습니다. 시민들이 어떤 의견을 표출하기도 전에 이미 정부의 의도대로 프레임을 씌어 여론을 몰아가는 것은 자유롭게 의사를 표출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 정신에 명백하게 위배되는 행위였습니다. 해설가 분께서는 이런 일이, 이명박 정권의 광화문 시위에서도 나타난다고 지적하셨고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로운지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국가권력이 이토록 무자비하게 국민의 존엄성과 권리를 유린할 수 있는가 하는 현실에 화가 났습니다. 일반 관람객들은 보지 못하는 더욱 끔찍하고 잔혹한 피해 사진도 많을 테지만 주먹밥을 담았던 양은그릇에서,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의 반짝이는 눈빛에서 감히 그들의 숭고한 투항정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자치를 통해 광주의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고, 대학생들은 자체적으로 교육지표를 만들어 교육정상화를 위해 애썼습니다. 또 항쟁의 기간 동안 약탈이나 범죄의 수는 늘어나기는 커녕 감소했다는 뒷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분들의 행동하는 지성과 양심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층과 3층에는 각각 다양한 기록과 유산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물들이 우리에게 온전히 다가오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시민들이 내어준 기록물들이 정부에 의해 다시금 은폐 되고 사라지며 시민들은 또다시 상처받고 분노하였을 것입니다. 다행히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이 지어진 이후부터는 모든 기록과 현장들이 이곳에서 생생히 잘 보존되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의 역사는 지나가버린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518 유족들은 여전히 마음 속 깊숙이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고 이 상처를 딛고 이룩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진행 중 입니다. 정부는 부끄러운 과거를 덮어두고 책임전가하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꼼꼼히 고찰하고 반성하고 끊임없이 그 부끄러움을 되새기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3층 구석에는 518민중항쟁과관련된 도서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그 중 “그해 오월 나는살고 싶었다.”라는 책에는 실제 518유족 분들의 증언을바탕으로 한 진짜 광주시민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었습니다헌혈을 하러 갔다가 총알에 맞은 중학생버스운전사였던 아들의 죽음 등 그들의 이야기는 그냥 우리네의 이야기였습니다.저항정신이 유달리 투철한 반정부적인 시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시민 한 명의 이야기였습니다책을 읽으면서 눈물이 계속 날 수 밖에 없었고 죽음을 맞이한 억울한 영혼들의 외침에 억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1980년 5월 따스한 봄을 맞이해야 할 광주 시민들에게 그 해 봄은 너무 시리고 차가웠을 것입니다. 저희가 이 곳을 방문한 것처럼 한 사람이라도 더 이 곳을 방문하며 끝까지 기억하고 마음에 새긴다면 그 해 광주에서 많은 시민들의 희생이 조금은 시리고 덜 차갑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광주에서의 탐방 일정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저희 태풍 운김은 서대문형무소로 향했습니다.

 저희는 민주열사들을 비롯해 독립투사들바로 선 대한민국을 위해 힘썼던사람들의 혼이 담겨있는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했습니다수많은 민주열사들이 누가 봐도 정당하지 못한 이유로수감을 당하고 목숨을 잃어갔던 사실을 마주하니 지금엔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소한 생활 하나하나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음을 다시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형기록표 속 사진들에는 악랄한 고문에 얼굴이 붓고붕대를 감고피를 흘리는 선열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당연한 것이 당연함이 아닌 세상에서 옳음을 주장할 수있었던 그들의 열정에 그저 감사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가히 그들의 고통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고문방법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보면서 반인륜적인 행위에 경악을 금치 못함과 동시에 이런 형벌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뜨거운 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누구의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었습니다심훈;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민주열사들의 피와 땀을 위해서라도 부끄럽지 않은 현실을 살 수 있도록끊임없이 세상을 향한 질문을 던질 것을 다짐했습니다

고문체험 중 우연히 서대문형무소에서 tv촬영중인 여행프로그램팀(‘구석구석코리아’ 1013일방송예정)과 만나 고문체험의 소감에 대한 인터뷰를 요청 받게 되었습니다저희의 소감을 또 영상으로 남기게 되어 새롭고 뜻 깊은 경험이었습니다.

마지막 즈음에는 교양예능에서 보곤 했던 옥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현재이 곳은 옥사 문 앞에 주요 독립운동가와 민주운동가 분들의 소개와 발도장이 담긴 전시물을 마련해 놓았고옥사내부는 다양한 예술적 형태로 그 분들을 기억하게끔 구성하였습니다기억에 남는 몇 분이 계신데 문익환장준하전태일.. 등귀에 익은 이름에 비해 평소 잘 몰랐던 분들이라 더욱 기억하고자 하는 분들입니다그 중 재야노동운동가로왕성하셨던 유해우 민주지사는 현재 이 곳 서대문 형무소역사관의 도슨트로 활동하고 계신다고 합니다또 한승헌 변호사는 민청학련사건 등굵직한 시국사건들을 도맡으셨던 핵심적인 인물로 일을 하는 와중에도 언제나 유머를 갖고 계셔서 유머집이 따로 있을 정도로 다방면에 능하셨던 분이라고합니다그 외에도 이소선 여사 등 어디선가 성함은 들어봤지만 다소 몰랐던 분들에 대한 소개가 아주잘 전시되어 있으니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근처 방문하시는 분이라면 꼭 들려주시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반대편에 위치한 열사들의 투옥생활을 보조하였던 가족들이 살았다고 알려지는 옥바라지 골목을 탐방해보았습니다. 지금은 예전의 모습은 자취를 감춘 상태로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고 현대적인 건물들이 들어선 새로운 모습을 마주했습니다.

 옥바라지 골목은 지난 2016년, 거주민과의 충분한 협의가 이루어 지지 않은 채 폭력적 행위가 동반된 재개발이 이루어진 바 있습니다. 40년 전 사람다운 삶을 살기위해 싸웠던 민주열사의 혼이 담긴 골목에서 여전히 시민들의 인권은 보호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공사판으로 가득 찬 무악동의 모습을 보면서 건물과 같이 무너져버린 사람들의 삶에 공허함이 느껴졌습니다.




 저희는 서울 명동에 위치한 명동성당으로 향했습니다. 1987년 6월 서울 명동성당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성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박종철 군 고문 치사사건의 조작, 은폐에 대한 강한 반대의 목소리를 보냈으며 서울 시내는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는 국민들의 함성으로 가득했습니다. 성당을 둘러싼 삼엄한 감시에도 명동성당을 민주항쟁의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민주화 열기가 들불처럼 전국 곳곳으로 번지자 대통령직선제 실시 등을 담은 6·29선언이 발표되고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은 막을 내렸습니다.

저희가 이곳을 마지막 일정을 결정한 이유는 이곳이 거점이 되어 그토록 잔인하고도 무자비했던 독재정권을 시민들의 힘으로 마무리 지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지속되어온 독재정권들 속에서 본인의 희생을 아끼지 않고 민주적인 나라로 나아가는데 함께하고 힘을 보탠 그 시절을 보낸 모든 분들의 노고에 저희는 감사했습니다.


 마지막 날의 명동성당은 어느날 보다 선선하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1980년대의 87년의그 곳의 사람들의 마음은 더 없이 착잡했을 것이며 밝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원하던 그분들은 그들의 양심에 따라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분들의 희생이 부끄럽지 않을 그런 민주시민으로서 더욱 열심히 살아가야겠음을 수십번도 더 다짐한 장소였습니다.  저희도 양심을 지키는 청년으로 살아가겠습니다!!

ADIOS-! 민주야 여행가자!2018 9 30일을 마지막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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