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민주일주 여행(4) 20180831 여수

통영에서 늦은 밤 버스를 타고 여수로 이동했다. 상당히 오랜시간이 걸리는 여정이었지만 차 안에서 한국의 아시아전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흥미진진했다. 심지어 골을 넣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고 손흥민 선수가 드디어 군면제 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재잘거리자 금새 여수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볼 수 있었던 것은 여수의 야경이었다.


여수까지 왔으니 여수 밤바다를 봐야겠지 않겠냐며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케이블카를 타기 전에 그 주변에 잘 꾸며 놓은 공원에서 구경을 하다가 설레는 마음으로 탑승했다. 찬란한 야경의 불빛과 잔잔한 바다가 어우러져 상당히 아름다웠다.

연신 여수밤바다를 부르며 포차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였고 너무 습했기 때문에 실내에 들어가서 먹기로 했다. 맛집을 찾으려고 애를 쓴 결과 꽤나 평이 좋았던 삼합집을 발견했다. 통영에서 아침에 꿀빵을 사먹은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상당히 허기진 상태였었다. 나오자 마자 우리는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다음날 우리는 아침일찍 일어나 해돋이를 보러 갔다. 날씨는 너무 좋았고 해가 바다 위로 떠오르는 모습은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왜 해가 생명의 근원이라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노른자 같은 해가 떠오르자 생명의 에너지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아침을 오는 길에 사온 라면으로 때우고 점심을 맛있는 간장게장을 먹으러 갔다. 원래 엑스포역 근처에 있는 곳을 가려고 했는데 택시 기사 아저씨가 거기에는 맛집이 없다며 자신이 자주 가는 음식점으로 데려다 주셨다.
정말 말도 안되게 맛있었다. 과연 밥도둑의 진수였다..!!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 우리는 여순사건 관련된 비석들을 보기 위해 나섰다. 그런데 힘들었던 점은, 위령비와 형제묘를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기가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지도상 위치도 제대로 안잡혔기 때문에 택시기사 아저씨를 부르기도 힘들었다. 어렵사리 잡은 택시를 타고 기사님께 여쭤보자 자신이 거기 어디인지 안다며 친절히 데려다 주셨다.


가는 길은 상당히 열악했다. 일방통행의 터널밖에 없어서 신호를 상당히 기다려야만 했다. 터널의 돌들은 식민지 시절 일본사람들이 조선인들을 시켜 쌓아 놓은 것이라 했다. 기나긴 터널을 지나오면서 우리 선조들의 피로 쌓아올려졌다고 생각하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여순사건이란 제주도 4.3 사건 진압 충돌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단독 정부를 저지하려고 전남 여수, 순천에서 국방부 일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전라남도 동부 6개 군을 점거하였는데,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가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하여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을 사살하였다. 진압군은 먼저 종산국민학교에 아무런 관련 없는 민간인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을 대거 수용하였다. 그런 다음 처참하게 살해했다고 한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 보안법' 을 제정했으며 강력한 숙군 조치를 단행하게 되었다.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는 인도도 없는 차도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그냉 도로변 옆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기에 택시에서 후다닥 내려야만 했었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린 곳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더러 찾아가기 너무 열악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안내 표시판도 한 두개 정도 뿐이었고 오고 가는 사람들의 흔적 또한 발견할 수 없었다. 


자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는  총칼을 시민에게 겨누었고 그 과정에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 조차 수천명이 죽어나갔다. 대략 2000~5000여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순사건은 정부 차원에서 정치적 위기감을 갖게 했고, 결과적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의 철권 통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여순사건을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 이라고 비난하며, 반란 주동에 직, 간접적으로 관계되어 있건 좌파 계열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형제묘


  


위령비 옆에 있는 만성리 형제묘도 찾아갔다. 만성리 학살지와 함께 널리 알려진 이 곳 형제묘는 학살 후 시신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형제묘라 이름 붙여진 곳이다. 형제묘 또한 도로변 옆에 동떨어져 위치해 있었다.
희생자 위령비보다 열악했던 환경이었는데, 바깥에서 보기에는 형제묘가 있다는 것 조차 확인할 수 없었고 형제묘와 관련된 팻말 2개가 있었을 뿐이었다. 돌계단을 올라가서야 형제'묘' 를 볼 수 있었다. 

형제묘에 관한 글이 적혀 있는 팻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었다.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부역혐의자들 중 125명이 1949년 1월 13일 '이 자리' 에서 총살되고 불태워 졌다. 당시 여수 경찰서 사찰계 형사가 학살 현장을 직접 지켜보았는데, 5명씩 총살 한 후에 다시 5명씩 장작더미에 눕혀 5층으로 쌓은 큰 더미 5개, 125명이라는 이야기를 증언하였다. 처형은 헌병들이 주도하였으며 장작더미에 기름을 부어 태웠고 처형된 가족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세우고 태워진 시신 위로 큰 바위를 굴려서 덮었다. 시신은 3일간이나 불에 탔으며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는 함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한다" 

이 내용을 보고 우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찌 한 나라의 정부가 시민에게 이와 같은 잔혹한 일을 행할 수 있단 말인가. 불과 60여년 전 이곳에서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도 숙연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러한 곳을 왜 사람들이 더 찾지 않으며 찾기 힘든 공간에다가 두었는 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또한 다른 팻말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위 장소는 1948년에 발생한 여순사건( 여수시 만성리 형제묘 학살사건) 의 민간인 집잔 희생지로서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국가 차원의 조사가 진행중이므로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는 데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진상규명 중이라는 점이 화가났다. 하루 빨리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기려야 할 것이다.


이런 내용들을 보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난데 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해 보니 그곳은 레일바이크로 유명한 곳이었다.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해도 모자랄 자리인데, 옆에서는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경치를 구경할 수 있게 만들어 놨다는 점이 이해가 안갔다. 그들은 바로 옆에 있는 이 공간에서 60여년 전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나갔다는 것을 알까? 물론 그들의 잘못은 아니지만 이 곳에 쉽게 접근하고 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을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여수 엑스포역에 도착한 우리는 전시회에 가서 구경을 한 후 실타래 팥빙수, 망고 빙수를 먹고 뻗었다. 강행군으로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니 모두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다. KTX 를 기다리는 동안 한숨 자고, 우리는 저녁 늦게 서울에 도착했다.

몸은 고단했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서 너무나도 배운 점이 많았다. 단순히 인터넷을 찾아보면서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 직접 찾아가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었다. 다시금 이런 여행의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앞으로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민주주의에 대해 깊게 고찰할 것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