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차에는 故 장준하 선생과 관련된 인물들을 알아보고 통일에 대한 고민을 해볼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첫 번째 장소는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위치한 통일문제연구소다. 통일문제연구소는 백기완 선생이 설립했으며, 우리나의 민주화와 통일에 관련된 내용들을 연구하고 책을 발간하여,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던 곳이다. 이곳을 세운 백기완 선생은 1932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학업을 위해 아버지와 서울에 내려왔다가 분단으로 인해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6·25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쟁의 고초를 겪었다. 이후, 1974년 故 장준하 선생과 함께 유신헌법 개헌청원을 주장했으며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故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이후에도 수많은 민주항쟁과 촛불시위 등 민주화, 통일, 노동운동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앞장서서 나섰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몸소 겪으신 분을 직접 찾아가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연구소를 방문했다. 연구소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우리가 평소에 여가활동을 즐기기 위해 지나가던 그 길, 대학로 주변 많은 주택이 있던 그곳에 있었다. 사실 연구소가 백기완 선생이 직접 거주하는 집을 사용한 것이라 지나칠 뻔했다. 그러나 우리는 연구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항상 열려있다던 연구소의 대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혹시 몰라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최근 기사에서 백기완 선생이 심장질환으로 수술하셨다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스쳐 지나가면서 아직 병원에서 퇴원하지 않으신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나마 문 앞에서 백기완 선생의 쾌유를 기원했다. 그리고 백기완 선생을 만나 민주화와 통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백기완선생의 통일문제연구소.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9길 27에 위치해있다. 사진 중앙 위쪽에 있는 간판이 없으면 연구소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일반 가정집처럼 보인다>

<통일문제연구소 대문. 평소 열려있다던 대문은 우리가 방문했을 때 굳게 닫혀있어 큰 아쉬움을 남겼다>


통일문제연구소를 뒤로하고 다음으로 이동한 장소는 문익환 목사의 통일의 집이다. 문익환 목사는 1918년에 태어나 1994년 사망한 인물로,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에 있어 커다란 역할을 했다. 학창시절 故윤동주, 장준하와 함께 공부했다. 이후 한국신학대학과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하며 목사의 길로 나아갔다. 1968년 성경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했으며, 그 과정에서 시인이 되었다. 민주화 운동은 전태일과 장준하 선생의 사망을 계기로 시작했고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1980년대에는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통일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문익환 통일의 집은 문익환 목사가 생전 실제로 거주하던 집으로, 목사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시민들의 스토리 펀딩 지원으로 개관하였다.

이곳이 골목에 있어 찾아가기 쉽지 않았지만 목사의 유품 약 2만 5천 점을 실제로 볼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찾아갔다. 통일의 집에 도착하고 안으로 들어서자 새로 단정한 마당과 집 외관, 내부 전시는 너무나도 깔끔하게 정돈되어있었다. 집에 들어선 후 인솔해주시는 분을 따라 거실을 시작으로 3개의 방을 둘러보았다.


<통일의 집 전경. 다른 주택들과 같이 있었지만 통일의 집으로 바꾸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통일의 집 입구에 걸려있는 게시물. 서대문형무소에 방문했을 때 봤던 포스터도 전시되어 있었다>


처음에 들어간 방은 목사님의 어머님, 아버님이 쓰시던 기도방이었다. 문익환 목사는 이곳을 서재와 기도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곳에는 목사가 만주 용정촌에서 거주할 때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용정촌을 비롯하여 문화의 집에서 찍었던 가족사진들과 같이 문익환 목사의 추억들이 담긴 사진들과 유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사진은 학창시절 故 윤동주 시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인물들은 당시 그들이 처한 암울한 시기와는 반대로, 참으로 앳되고 순수해 보였다.


<기도방에 전시되어있는 사진들. 故 문익환 목사의 부모님 영정과 만주에 거주할 시절 사진들이 목사의 어린 시절을 느끼게 해준다>

<故문익환 목사가 故윤동주 시인과 함께 찍은 사진. 숭실중학교 재학 당시 촬영한 사진이다>


다음으로 문익환 목사와 아내 박용길 장로가 실제로 지냈던 안방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故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전편과 그의 시집, 자녀들의 편지와 기념품, 그가 썼던 물품과 가족사진 등이 있었다. 특히, ‘구약성경의 대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언어로 된 성경책이 있었고, 당시 일본어·중국어투로 되어있던 성경을 순우리말로 바꾸기 위한 목사의 노력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그곳에는 박용길 장로에게 보낸 연애편지가 있었는데, 그 속에는 한문, 일본어, 순우리말 등 다양한 언어가 섞여있었다. 인솔해주시는 분에 따르면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만주, 미국 등에 살면서 국어, 일본어, 중국어, 영어 등에 능통했고 성경을 공부하면서 독일어와 히브리어 등의 최소 5개국어 이상을 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엘리트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 안에는 故 장준하 선생의 영정사진이 있었는데, 실제로 장례식 때 썼던 영정사진이며 목사가 사망하기 전까지 그 방에 놓고 계셨다고 했다. 그만큼 故 장준하 선생을 그리워했던 것 같다. 이외에 많은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다소 경건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고 과거의 역사를 눈앞에서 실제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안방에 전시된 물품들. 가운데 유리장에는 故문익환 목사가 감옥에 있을 때 자녀들, 손자들이 보낸 편지와 목사가 썼던 물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안방 책장에 전시된 물품들 갈색의 책들은 『사상계』 전편이다. 사진 오른쪽의 사진은 故장준하 선생의 영정사진이다>


마지막 방에서는 故장준하 선생 사후 59세부터 우리나라의 민주화·통일운동에 참여한 목사님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었다. 실제로 그가 입었던 수감복과 긴급조치 판결문, 그의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영상 등을 보면서 역사적 자료와 물건들을 볼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슬픈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목사와 관련된 영상 속, 영화 1987의 유명한 엔딩 장면이 나오자 이 슬픔은 더욱 커졌다. ‘옳고 바른 말을 했다는 이유로 이렇게 큰 고통을 치를 수밖에 없었는가? 이렇게 어렵게 이루어낸 민주화는 이분들이 원하는 것처럼 이루어지고 있는가?’라는 의문과 함께 가슴속에 응어리가 맺히는 것 같았다.


<故 문익환 목사가 처음 구금되었을 때 입었던 죄수복>

<그가 방북했을 때 발표된 4.2공동성명서. 후에 6.15남북공동선언의 기초가 되었다>


마지막 방을 나오며 알게 된 사실은 우리를 인솔해주시던 분이 故 문익환 목사의 친딸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신기함과 놀라움에 몇 가지 질문을 추가로 했고 그분은 친절하게 자세히 알려주었다. 지금까지 통일의 집에서 봐왔던 모든 것을 직접 보고 느낀 살아있는 역사인 분이 우리 눈앞에 있었는데 그것을 몰랐다. 너무 죄송했지만 괜찮다고 하셨고 우리는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분은 우리가 나갈 때까지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우리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다음 장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故 문익환 목사의 딸인 문영금 여사>

<통일의 집 뒤에 그려진 故 문익환 목사의 모습>


드디어 우리의 마지막 장소이자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곳인 임진각으로 향했다. 임진각은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곳으로 휴전선에서 약 7km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우리 팀원들 모두 임진각을 방문한지 오래되어 굉장히 근엄한 분위기를 예상하고 갔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그곳에는 각종 놀이기구와 식당을 비롯한 다양한 매장이 있는 커다란 전망대, 바람개비 동산과 각종 음식점 등 임진각은 단순히 답사의 개념이 아니라 가족끼리 즐길 수 있을만한 관광지였다.

우리가 그곳에서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특별 전시관인 ‘군사시설 지하벙커 전시’였다. 그곳은 6·25전쟁 당시 국군의 벙커였던 곳을 개조한 곳으로 6·25전쟁 당시 사용했던 다양한 군용물품들과 관련 영상을 볼 수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그곳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영상을 보면서 매우 진지한 자세를 취하고 슬픔을 공유하는 모습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6·25전쟁의 참혹함을 잊고 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분단 전 경의선을 달리던 증기기관차와 전쟁 당시 생긴 탄흔이 남은 경의선 독개다리를 보러 이동했다. (이곳은 민간인통제구역으로 증기기관차를 지난 이후에는 지정된 부분만 촬영이 가능했다) 증기기관차를 보며 이제는 북쪽으로 달릴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증기기관차 옆에는 철책이 있었는데 철책에는 통일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리본들이 묶여있었다. 이 리본들은 독개다리 이후 갔던 ‘자유의 다리’ 끝에 있는 통문에도 묶여있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현실이 느껴졌다. 독개다리 끝에는 과거에 사용되었던 교각들이 남아있었는데, 그것에는 전쟁 당시 새겨진 탄흔들이 있었다. 총탄이 꽤 많은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전투가 치열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임진각의 모습을 보면서 6·25전쟁이 남긴 아픔이 얼마나 큰지 느꼈다. 동시에 바로 옆에 개설되어있는 새로운 경의선 철로를 보며 하루빨리 저 철로에 기차가 지나다니기를 바라며 임진각을 떠났다.


<임진각관광지에 있는 전망대. 옥상에 올라가면 망원경을 통해 북한의 일부를 볼 수 있다>

<6·25전쟁 당시 사용했던 군용품. 유해발굴 과정에서 발굴된 소총일부와 탄피, 수통. 반합>

<(구)경의선을 달리던 증기기관차. 팀원들 뒤에 있는 기관차는 실제 운용되던 기관차의 모형이다>

<증기기관차 주변에 있는 철책에 달린 많은 사람들의 통일의 염원을 담은 리본들>

<(구)경의선 독개다리. 중간을 기차 내부처럼 꾸며놨으며 선로 일부가 바닥에 설치되어있다>

<(구)경의선 철로 일부.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6·25전쟁 당시 남은 탄흔>


임진각을 나서며 그간 4일 동안의 짧지만 감명 깊은 역사 탐방이 마무리되었다.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말자는 팀원들의 공통적인 생각으로 시작한 이번 탐방기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역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의 시발점인 탑골공원,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서대문형무소, 돌배개 출판사, 통일의 집, 임진각 등은 그간 우리가 잊고 살았던 민족의 아픔을 상기시켰다. 또한,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화에 모든 것을 바친 故 장준하 선생, 故문익환 목사, 백기완 선생과 같이 방문했던 장소의 주인공들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삶을 영위하신 분들이었고 우리의 다짐을 반드시 지키리라 약속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故 문익환 목사의 딸이신 여사님으로부터 들은 문익환 목사와 故장준하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딱딱한 책 속의 이야기들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 했고, 역사가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것처럼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다. 문익환 목사처럼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느꼈을 답답함과 애절함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나라를 되찾고 싶은 애절함,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답답함과 분노 들은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데 충분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살펴본 과거와 현재의 인물들이 겪었던 삶은 마치 단순히 연표와 같이 수치화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역사의 연표와 연표 사이에 그들이 느꼈던 기쁨, 슬픔, 좌절, 절망, 환희 등 다양한 감정들과 경험들이 있었고, 이는 그들이 남긴 글, 사진, 영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비록 지금은 젊은 우리지만 언젠간 현 세대의 모든 것들은 후손들에게 남겨질 것이며 그것은 일부의 유물과 유적 또는 연표 등의 일부 흔적일 것이다. 이에 우리들은 후손들에게 떳떳한 조상으로 판단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미래의 그 어느 날,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故 장준하 선생, 문익환 목사와 같이 당당한 조상으로서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팀원들은 삶의 매 순간을 일관되고 떳떳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번 탐방기를 통해 그간 책과 전공수업에서 느낄 수 없던 역사적 인물들의 삶과 감정들은 우리의 가슴속에 설명할 수 없는 울림을 느끼게 했다. 이런 좋은 기회를 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이번 탐방기를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