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을 기록하기 앞서, 저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먼저 풀어 놓고자 합니다.

저희 팀이 지향했던 민주주의 여행은 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민주주의 스팟을 주목하고, 민주주의 활동의 뒤에서 든든하게 지지해 주었던 `종교 사적`을 찾아 나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앞서 `꽃보다 호랑이`팀원 중 그 누구도 종교를 갖고 있지 않으며, 특정 종교를 우상화하거나 신봉하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먼저 고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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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3일!


민주 여행의 마지막 날은 서울에서 장식하기로 했습니다.

이 날은 2학기 개강날이기도 했지만, 모두 수업을 째는(!!)열정으로 민주 스팟을 찾아다녔습니다.


(시원하게 수업을 째고 시원하게 늦잠자버린 김진완 군!^9^)


방문할 장소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저희는 을지로 3가역에 내려서

명동과 을지로 3가 중간에 있는 <명동성당>부터 차례로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씨임에도! 연달아 이어진 여행에 피곤한 몸에도!

꽃보다 호랑이팀은 꿋꿋하게 걸어 명동성당에 다다릅니다!



 비가 오는 날의 명동성당은 그 자체로 운치가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월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명동성당은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특히 외국인들이 굉장이 많았는데요,

꽃보다 호랑이팀은 오면서 한국인보다 외국인을 더 많이 본 것 같았습니다 ^6^


(명동성당 앞의 호-랑이)


명동성당은 지금까지 방문했던 어느 종교 민주 스팟보다 그 크기가 컸는데요,


덕분에 돌아다니는 맛(ㅎㅎ)이 있었습니다.


탐방에 앞서, 박민수(20, 꽃보다 호랑이)군의 교양이 있었습니다.



명동성당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 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입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뒤 귀국한 때로부터 치지만

그보다 4년이 앞 선 1780년 1월 천진암에서는 권철신을 중 심으로 하는 강학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당시의 저명한 소장 학자들은 천주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 거행과 교리강좌를 열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복판에 겨레 구원 성업의 터전을 닦았고 

바로 이곳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주교좌 명동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동성당은 한국의 민주주의 명소 중 1번지로 꼽힐 정도로 많은 민주주의적 활동을 지원하였습니다. 


특히 대학생들의 사회참여운동을 지원하고 경찰로 부터 몸을 숨겨 주는 등,

 일종의 성역으로써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명동성당은 한국 민주 화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므로 반드시 방문해야 겠다고 생각한 곳입니다.


 대한민국 민주화 을 순식간에 앞당겼던 김승훈 신부의 성명서 낭독이 행해졌던 그 날의 공간을 직접 체험 해보고 싶었습니다.

비록 미사 중이어서 내부는 들어가보지 못했지만, 낡은 외관의 고풍스러움에서 그날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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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4일차 명동성당을 방문한 뒤 작성한 꽃보다 호랑이 팀원들의 후기 및 느낀 점입니다!


이예은 : 

우리나라 민주주의 1번지 명동성당! 다른 팀들 역시 반드시 방문할 것 같은 장소였지만, 그럼에도 빼 놓을 수 없는 공간이라 생각하여 탐방지에 넣었습니다. 명성과 다르지 않게 고풍스러운 옛 건물과 비오는 날의 정취가 합쳐져 더욱 정감이 갔던 곳이었습니다. 평화로운 이 곳에서 많은 민주적 활동이 일어났다니 믿기지 않았습니다.


안승범 : 

옷을 사러 명동에 자주 들리기도 하고 이 앞에서 사진도 여러 번 찍어 보았지만, 명동성당이 유명한 이유는 그저 도심 속에 있는 아주 커다란 성당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을 했었다. 실제로 성당이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서서 그 뒤편까지 구경을 한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민주야 여행가자에 잘 참여하였다고 느끼었다.


박민수 : 

명동성당에 대한 소개를 직접 맡아서 친구들에게 설명할 자료를 찾던 중, 김수환 추기경께서 학생들을 끌고 가려거든 자신을 먼저 밟고 가라며 앞장서서 막아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고 박종철 군에 대한 추모 미사가 진행되었던 성당 내부에 꼭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방문했을 때 미사가 진행 중이라서 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는 꼭 시간을 내서 내부를 직접 보고, 제 피부로 역사를 느끼고 싶습니다.


김진완 :

민주화의 성지라 불리는 이곳은 우리가 방문했을 땐 미사 중이라 아주 고요했다. 고요로 가득찬 이곳이 민주화 당시엔 엄청난 열기와 투기로 채워졌다는 것을 생각하니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다시는 이곳이 고요함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손유진 : 

명동성당은 모든 여행지중에서 가장 익숙한 곳이다. 워낙 유명한 곳이기도 하지만, 명동성당이 민주화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는 여행다니면서 처음 알게되었다. 대학생들의 사회참여운동을 지원하였다는데 미사중이어서 안에 들어가보지 못해서 안타까웠다. 다음에는 꼭 명동성당 내부에도 방문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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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방문지는 명동성당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향린교회였습니다.

 명동성당을 나와 길을 따라서 5분 정도를 걸으면 향린교회가 나옵니다.


모두의 시선을 받는곳에 우뚝 세워져 있는 명동성당과 달리, 향린교회는 낮은 저지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향린교회 앞에는 사회참여적인 문구가 적혀 있는 플랜카드가 많이 걸려 있었는데요,


 이를 통해 아직까지도 활발히 사회적 운동들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박민수(20, 꽃보다 호랑이)군에 따르면, 이 곳은 시작부터 사회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향린교회의 창립자들은 모두 신학을 전공한 바 없는 평신도들로서 학창시절부터 신앙동지로 지내오던 중

 민족과 교회가 직면한 위기를 뼈저리게 험하면서 이를 극복하려면 새로운 신앙공동체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고, 이를 위해 교회를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향린교회의 창립에는 민족의 고난으 로서의 6.25전쟁 체험과 그 고난 가운데서 철저하게 무능했던 교회에 대한 체험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향린교회는 6월 항쟁 당시 본부였던 ‘국본’의 탄생지입니다.


 호헌 철폐를 위한 범국민연합 전선이 절실히 요구되었고, 야당‧종교계‧재야 세력을 총망라한 국본은 5월 27일 창립 대회 를 열기로 하고 장소를 물색하였습니다.


 일반 시설은 엄두도 낼 수 없었고 종교 시설만 가능했지만 명동성당은 물론 종로5가 기독교 회관, 성공회 성당도 경찰들에게 봉쇄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명동성당 바로 밑인 향린교회에는 경찰이 없었고, 당일 오전 전국의 2,191명의 발기인을 대표하는 계훈제, 박형규 등 150여 명의 각 계 인사들이 30분 만에 모여들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공동대표와 임원선출, 결성선언문 낭독, 만세삼창 순으로 결성대회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명동성당처럼 눈에 띄는 위치는 아니지만, 오늘도 여전히 조국의 통일과 민중 생존권 보장을 호소하는 현수막이 걸려있습니다.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악을 비판하고, 시달리는 억울한 민중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셨던 향린 교회의 홍근수 목사님을 비롯한 신도들의 민주화를 위한 열의를 느낄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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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4일차 향린교회을 방문한 뒤 작성한 꽃보다 호랑이 팀원들의 후기 및 느낀 점입니다!


이예은 :

명동성당과 별로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상당히 놀랐다. 그리고 교회의 외관보다는, 사회적인 성격을 띄는 건물이라고 믿을 정도로 플랜카드가 많이 걸려 있어 과연 민주주의 스팟에 걸맞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신앙 활동에 관련된 사람들이 세운 교회가 아니라는 설명을 듣고, 당시 사람들의 사회 참여적인 인식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안승범 :

향린교회 역시 주민교회의 경우와 같이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동네 수준의 교회이어서 무심코 지나치어버리곤 하였다. 향린교회가 민주화의 맥락에 위치해 있는 역사적 사실을 교양을 통해서 알고 나니 나흘을 여행하며 공통적으로 느낀 한 가지-세상의 일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또다시 느낄 수 있었다.


박민수 :

향린교회는 명동성당을 감시하던 경찰들의 눈을 피해 국본이 선택했던 장소라는 말을 들었지만, 정말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표현해주듯이 생각보다 너무 명동성당과 가까운 거리에 놀랐습니다. 아직까지도 평화통일을 기원한다는 현수막이 교회 벽면에 크게 걸려있는 걸 보고, ‘향린’ 즉 이웃을 사랑한다는 교회의 이름에 걸맞은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김진완 :

명동성당과 근처에 있지만, 웅장한 다른 건물들에 비해 다소 초라한 건물의 모습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많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는 점이 인상깊었다. 이런 초라한 공간에서 탄생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민주화라는 거룩한 승리를 이끌어 냈다는 것을 보면,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손유진 :

명동성당과 너무나도 가까운 곳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6월 민주항쟁 떄에 경찰의 눈을 피해 명동성당이 아닌  이곳에 모여 국본을 만들었다고 한다. 크고 눈에 띄는 명동성당과 달리 향린교회는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언론이나 책에서 향린교회에 대해서도 다뤄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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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호랑이 팀은 열심히 밥을 먹고!!



세 번째 민주 탐방지로 향하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조금 걸어야 했던 이 곳은 바로 성공회대성당이었습니다!


외관이 상당히 눈에 띄었습니다.


동양적인 느낌의 지붕과 서양적인 토대를 갖춘 이 곳은, 보이는 바와 같이 유래가 깊은 곳입니다.


성당 내부 역시 고풍스러웠습니다!


성당 내에는 영화에서만 보았던 여러 악기들과(비싸 보였습니다..) 많은 신성한 물건들이 놓여져 있었는데요,


꽃보다 호랑이팀은 내부의 고풍스러움에 감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성공회대성당의 교양을 맡은 김진완(20, 꽃보다 호랑이)군에 의하면,


1890년 12월 21일, 당시 조선에 성공회 선교를 위해 영국으로부터 파송된 찰스 존 코프 주교와 신자들이

현재 성당이 위치해 있는 곳의 한옥을 매입하면서부터 서울성공회성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성당의 이름은 “장림성당 (The Church of Advent)”이었습니다.

 이후 1892년 11월 17일 같 은 자리에 새 한옥을 짓고 축성식을 거행했습니다.

 1909년에는 성당 주변의 땅을 매입해 부 지를 확장하고, 

 1910년 열린 첫 교구회의에서 주교좌성당 건축을 결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커다란 십자가를 눕혀 놓은 형상으로 6.10민주항쟁의 진원지입니다.


1987년 6월 10 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약칭 ‘국본’) 관계자 50명 이 모인 가운데,

대성당과 주 교관 사이의 마당에서 ‘고문 살인 은폐 및 호헌철폐 국민 대회’가 열렸습니다. 


박형규 목사, 오충일 목사, 김명윤 변 호사, 양순직 전 의원 ,유시춘(유시민의 누나)과 지선 스님이 

분단 42 년을 끝장내자는 의미로 42번의 종을 울린 이력이 있습니다. 


여성과 스님이 종을 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성당 주변에서는 6월 민주항쟁에 관한 흔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참을 그러한 흔적 앞에 서성이는 사람들을 보며,


민주주의가 이룩한 평과와 그것을 이어가는 정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성당 앞에서 셀카를 찍으며,


성공회 대성당 탐방 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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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4일차 성공회대성당을 방문한 뒤 작성한 꽃보다 호랑이 팀원들의 후기 및 느낀 점입니다!


이예은 : 

성당에서 스님과 여성이 종을 울렸다는 사실을 듣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민주주의를 살리자는 불씨는 당대의 차별도 억누를 정도로 엄청난 의지였음이 확 다가왔다. 지금까지 방문했던 여느 성당 건물들과 다르게 동양 건물과 서양 건물이 적절히 혼합되었는데, 그것만의 오묘한 아름다움에 눈을 떼지 못했던 즐거운 여행 스팟이었던 것 같다.


안승범 : 

상징적인 외관과 관련한 건축양식과 성공회의 선교 모토도 제법 인상 깊었지만 천주교가 아닌 다른 종교계 인사가, 남성이 아닌 여성인사가 민주화의 발전에 기여를 한 장소라는 점에서 다른 생각거리를 던져 받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발생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갈등과 분쟁이 아닌 방법으로 풀어나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길 바란다.


박민수 : 

성공회성당은 건축 양식부터 매우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건물 모양이 십자가인 점이 우선 특이했고, 가장 신기했던 점은 한국식 기와와 서양식 벽돌을 함께 이용하여 지붕을 만들었는데도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작은 건물 같았지만, 직접 성당에 들어가서 보니 생각보다 큰 크기에 놀랐습니다. 큰 크기에 압도되어 뭔가 숙연해지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주변의 시끄러운 빌딩 숲 사이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역사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아 인상 깊었던 장소입니다.


김진완 : 

 6월 민주항쟁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장소였다. 항쟁의 후반에 명동성당으로 그 근거지가 옮겨지면서 그리 조명받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6월 민주항쟁 당시 여성과 스님이 이 성당의 종을 울렸다고 한다.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던 종교 단체가, 민주화를 위한 화합하고, 보수적인 자세를 포기할 줄 알았다는 것이 놀랍고도 신기했다.


손유진 : 

성공회대성당의 내부를 들어가봤더니 굉장히 고요했다. 그리고 굉장히 현대적으로 꾸며놓았다는생각이 들었다. 예수의 모습도 다른 교회나 성당들보다 더 예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이면서도 기와 등의 한국의 건축 양식이 포함되어있었다. 이곳이 6월 10일 민주항쟁의 진원지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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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탐방지인 조계사로 향하는 길은 꽤나 멀었습니다!


(외국인인척 해보고 싶다던 안승범(20, 꽃보다 호랑이)군)


덕분에 즐겁게 담소를 나누면서 서울 시내를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상당한 거리를 걸어서 조계사에 도착했습니다!



지금까지 방문했던 모든 종교 스팟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았는데요,


수능 백일기도(!!)를 하러 오시는 아주머니들, 할머니 뿐만 아니라


절을 방문하려 온 외국인들이 많았습니다.


(또 굳이 콧구멍을 파겠다고...)


잠시 재정비의 시간을 가진 뒤, 교양을 진행했습니다!




조계사는 한국불교를 대표 하는 조계종의 총본산으로 

대중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추구하는 대승의 보살정신이 살아 숨쉬는 공간입니다.


또한 한국근현대사의 격동기를 우리 민족과 함께한 역사의 현장으로, 특히 암울한 일제 치하 시대를 극복해 낸 민족 자존의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계사는 일제치하인 1910 년, 조선불교의 자주화와 민족자존 회복을 염원하는 스님들에 의해 각황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습니다. 


당시 각황사는 근대 한국불교의 총본산으로 근 대 한국불교 최초의 포교당, 일제하 최고의 포교당이었으며 4 대문 안에 최초로 자리 잡은 사찰이었습니다.


1937 년 각황사를 현재의 조계사로 옮 기는 공사를 시작, 이듬해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하 여 절 이름을 태고사로 했습니다. 


태고사 를 창건하면서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은 정읍에 있었던 보천교(普天敎) 십일전(十 一殿)을 이전하여 개축하였으며, 1938 년 10 월 25 일 총본산 대웅전 건물의 준공 봉불식을 거행했습니다. 


1954 년 일제의 잔재를 몰아내려는 불교정화운동이 일어 난 후 조계사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한국불교와 그 대표종파인 조계종의 주요 사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1987.06.20 국본 산하 불교공동 위원회(위원장 청화,지선 스님) 주최로 조계사에서 열릴 예정이 었던 ‘민주화를 위한 구국대법회’ 가 대회장 주변에 배치된 경찰에 의해 사전 봉쇄되자

 노상에서 시 위를 진행하였던 것이 주 활동입니다. 


이 곳을 선택한 이유는 산 것을 죽여서도, 남을 시켜 죽여 서도, 죽이는 것을 보고 묵인해 서도 안 된다는 부처의 가르침 을 조계사의 스님들이 앞장서서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한국 민주화 역사에서 불교계의 역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인 조계사를 방문하여, 불교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꽃보다 호랑이팀은 이전에 방문했던 성공회대성당에서 종을 치셨던 스님이

조계사 출신 스님이었다는 말을 듣고, 우리나라의 민주화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노력하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꽃보다 호랑이 팀은 이러한 민주화 정신을 받들어 앞으로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조계사까지 모든 탐방을 건강하게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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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4일차 조계사를 방문한 뒤 작성한 꽃보다 호랑이 팀원들의 후기 및 느낀 점입니다!

이예은 :

종교인들이 얼마나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힘써주셨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탐방이었다. 특히 조계사 탐방은 천주교, 기독교가 아닌 우리나라에 수천년동안 함께 했던 불교였기 때문에 더 뜻깊었던 것 같다. 민주주의를 위해 힘써 주셨던 스님의 의지를 받들어 이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안승범 :

마지막 여행지이자 첫 불교 성지인 조계사. 절은 주로 산 속에 위치하여 있어서 비교적 현대에 일어난 민주화 운동과 크게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명동 도심 속에도 이렇게 커다란 절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한편으로는 일정상의 한계로 가보지 못한 강원도의 백담사가 자꾸 눈에 밟히기도 하였다.


박민수 :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이렇게 큰 절이 있다는 사실이 일단 놀라웠습니다. 생각보다 불교와 민주화에 대한 연결 관계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스스로 반성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절이 대부분 높은 산에 있는 경우가 많아 이번 여행에서 너무 외진 곳에 있는 절을 찾지 못했던 점을 아쉽게 생각했습니다.


김진완 :

민주화 운동에서 불교의 역할은 크게 조명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관광지로서 관광객들로 가득 찬 이 곳이 과거에는 민주화의 열기로 가득 찼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손유진 :

불교라서 그런지 그동안 방문했던 교회나 성당과의 느낌이 매우 달랐다. 이런 절이 서울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정말 휴식과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불교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에 기여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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