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여성, 싸우는 여성, 승리하는 여성.


우리는 지금 어떤 사회에 살고 있을까? 페미-워커-파이터의 팀원들은 세상을 여성주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것에 관심이 많았다. 페미니즘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불합리하고, 불공평했으며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천지였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에는 물론이고, 여성만 경제활동을 할 경우에도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이 더 많은 것.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 임금의 36%를 덜 받고있고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 또한 고등학교 교과서와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민주화운동/노동운동이 항상 띄고 있던 남성의 얼굴들, 그 뒤로 잊혀지고 가려진 여성운동의 역사. 우리는 여성이 차별받는 사회속에서 자연스럽게 사회가 바라보는 여성에 대해 의문심을 품게 되었다. 사회는 여성이 일하는 존재로, 싸우는 존재로서 살아가길 원치 않는것은 아닐까. 그렇기때문에 더욱 우리는 일하고 싸워서 승리하는 여성들의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이 여행은 계획되었다.


10년의 투쟁, 살아있는 역사

<KTX 해고승무원 직접고용 축하 어울림마당>



우리의 일정은 “KTX 해고승무원 직접고용 축하 어울림마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가장 최근의 여성노동운동이었으며, 10년의 시간동안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서 얻어낸 승리였기에 비록 여행 시작 이전의 행사이지만 꼭 함께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승무원들의 승리를 축하해주기 위해서 모였다. 철도노조에서, 성당에서, 교회에서 절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이렇게 함께 연대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는 영상을 시청하면서 많은 감정들이 교차했다. 역사에서 아이와 함께 KTX 부당해고를 호소하는 전단지를 나눠주는 장면이나, 어머니가 함께 투쟁에 참여하다 눈물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감정이 벅차올랐다. 파업을 진행하고 노동운동을 이어나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겠지만, 여성인 나의 입장에서는 더욱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는 일이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이 싸우는 자리에 머무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분들이 긴 시간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 도운 용기와 의지가 더욱 대단하게 다가왔다.



옳다고 생각했기에 끝까지 싸울 수 있었다는 말씀을 들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이 그렇게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것 또한 연대의 힘이었을 것이다. 함께한다고 하여서 힘들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덜 힘들 수는 있기에. 내가 누군가에게 지지의 마음을 전하는것 만으로도 그들의 걱정과 힘듦을 덜어줄 수만 있다면 나는 모두와 함께, 모두에게 그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전에 방문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도 되면서 앞으로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표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노동자로서 권리를 가져야 사회가 더 안전해지고, 세상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 승무원들의 이야기가 마지막까지 깊게 남았다. 그들의 승리가 우리 사회의 승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한강의 기적의 주인공이지만 외딴방에 남아있어야 했던 금천순이의 이야기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 체험관>


우리는 어울림마당으로 첫 일정을 시작하여서 승리의 기쁨을 잔뜩 안고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그렇게 방문한 여행 첫날의 장소는 동맹파업이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를 재현해둔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 체험관”. 지금은 디지털단지로 이름이 바뀌고 고층빌딩들이 들어섰지만 그때의 가리봉동은 섬유와 봉제산업 공장들이 빼곡히 들어서있던 공단이었다. 아직 20살도 되지 못한 소녀들은 오빠와 동생의 학비를 위하여,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노동자 생활 체험관에서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체험하고 유추할 수 있었다.


좁고 낡은 방들이 모여있던 주택들은 벌집촌이라고 불렸다. 2층 양옥을 개조하여 37개의 방을 만들고, 그 방 한칸마저도 혼자 쓰기에는 비싸서 여러명이 모여서 지내야했었다고 한다. 여공들의 당시 작업환경을 기록해둔 글을 보며 한강의 기적은 결국 노동자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잔인한 성장이었다. 또한 모욕적인 언사, 성희롱, 고강도 저임금 노동.. 그때와 비교하여 나아졌다고 할 수 없는 현대의 노동환경을 생각하며 한강의 기적은 대체 누구를 위한 기적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었다.


전시관에는 구로동맹파업의 역사또한 잘 설명되어 있었다. 수백명의 여성이 함께 연대하고 투쟁한 자랑스러운 역사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구류감금과 불법해고를 당했지만, 그들은 다시 연대의 힘으로 투쟁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싸우는 여성 노동자 후배로써, 선배들의 정신을 이어 우리도 또 다른 역사의 주인공이 되리라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의 희생과 승리가 지금의 우리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친것처럼, 미래의 또 다른 소녀들을 위해 나도 싸우고 승리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여성의 시각으로 다시 바라보는 한국사

<국립 여성사 전시관>


여행의 두번째 날. 우리는 여성의 노동운동을 여성운동의 역사적 맥락속에서 파악해보기 위하여 고양시에 위치한 국립 여성사 전시관을 방문하였다. 이 장소는 민주탐방을 준비하며 처음으로 알게된, 국내에서 유일하게 여성사만을 다룬 공간이었다. 그간 수많은 박물관, 전시관을 갔고 그중에 많은 장소들이 역사를 이야기했으나 이렇게 여성의 역사를 독립시킨 경우는 처음이었다.


전시관은 1층과 2층으로 이루어져있는데, 1층에서는 매번 바뀌는 테마전시를 볼 수 있었고 2층에서는 한국사의 흐름에 따른 여성의 역사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에는 여권통문을 주제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여권통문이 선언되고, 여성의 배우고 익힐 권리를 위하여 학교를 세우고 가부장제와 싸웠온 역사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동시에 당시 발표된 내용이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잘 적용되고 있나 되돌아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씁쓸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전시관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서 여성노동운동을 다루기 위해 할당된 공간도 넓지는 않았다. 당시 역사적 자료들을 눈으로 볼 수 있는것은 좋았지만 더 자세한 내용들을 알 수 없던 것은 아쉬웠다. 관람 이후 전시관과 함께 있는 정보자료실을 방문하였다. 마감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오래 앉아 책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여성주의 서적들이 빼곡히 차있는 곳에 있는 것 만으로도 즐거웠다. 여성노동운동과 관련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꼭 읽어보고 싶은 책들도 찾아볼 수 있었다. 전시관에 방문하면서 텍스트로 된 자료를 함께 찾아본 경험은 처음이었는데, 전시와 책을 같이 경험하는 것은 두 매체를 이해하는데에 모두 도움이 되었다.



여성사전시관을 나서며 기록의 부재를 다시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역사가 권력에 의해 작성되는 사회에서 소수자와 약자는 잊혀지기 쉽다. 그렇게 계보를 잃은 운동은 무너지기도 쉽다. 우리는 싸우는 여성 노동자로 살면서 더 열심히 말하고 기록하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야겠다는 힘찬 다짐을 하였다. 


김경숙 열사의 생을 기리기 위하여 <모란공원과 신민당 당사 터>



셋째날에는 YH무역의 농성시위가 있었던 신민당 당사의 터와, 그날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김경숙 열사의 묘가 위치해있는 모란공원을 다녀왔다.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공부하던 중에 신민당 당사 터가 학교 근처인 공덕역 인근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었다. 지도를 보니 몇번 지나다닌적도 있는 건물이었다. 지금은 그 터만 남고 다른 건물이 들어섰지만, 바닥에 김경숙 열사가 투쟁 중 과잉진압으로 사망했다는 기념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김경숙 열사의 묘가 있는 모란공원에도 들렸다. 지도가 있는것을 모르고 들었던 대로 맨 위로 올라가려고 하다보니 길이 복잡하여서 많이 헤맸다. 내려오면서 왼쪽 큰 길가에 안내표시와 아래에 지도가 있는것을 알게되었다. 그러나 헤매면서 가며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노동자운동, 평화운동, 민주화운동, 다양한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의 삶을 짧게나마 읽으면서 절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또한 <가리베가스>라는 가리봉동 쪽방촌에 살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담은 김선민 감독님의 묘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헤매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분이었다.



김경숙 열사의 묘는 가장 꼭대기에 위치해있었다. 우리는 그분의 묘에 들려 추모하는 마음을 담은 꽃과 함께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젊고 싱싱한 나이에 우리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공장안에서 여러 형태의 억압을 받으며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혼탁한 먼지 속에 윙윙대는 기계 소리를 들으며 어언 8년 동안 공장 생활하는 나 자신을 볼 때 남은 것은 병밖에 없다.” YH 재직을 하며 남겼던 글을 보며, 우리는 누군가의 피와 땀과 눈물 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겼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삶 모두가 누군가의 투쟁을 통해 얻어낸 세상은 아름다우면서도 너무 슬프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돌아가서 같이 가리베가스 영화를 보는 시간을 가졌다. 과거의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던 그 자리에 다시 살고있는 현대사회의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 세상이 발전하는 속도에 맞춰서 노동의 내용또한 발전하지만, 우리의 인권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는것 아닌가 하는 답답함을 가지게 만드는 영화였다.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동일방직>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는 인천의 동일방직을 찾아갔다. 사실 이곳은 방문을 하는게 좋을지 고민을 많이 했던 장소였다. 과거에 똥물사건이라 불리우던 노동자들에 대한 비인격적인 탄압이 있었던 장소이지만, 동일방직의 사유지이며 그렇기에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되어야 할 역사가 묻힌 현장을 직접 보는것 또한 의미가 있는 발걸음이라 생각했기에 방문하게 되었다.


실제 동일방직 공장은 지금까지 방문했던 다른 장소들과는 달랐다. 어떠한 설명도 없었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시도조차 제지당했다.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니 설립자인 서정익 전 사장의 동상이 있었다. 우리는 그 앞에서 ‘페미-워커-파이터’문구가 담겨있는 플랭카드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었다. 비록 다른 기록은 남기지 못하여도 이렇게 사진을 찍음으로써 이 장소가 역사적인 장소였음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근처에 팀원의 조부모님께서 살고 계셔서, 우리는 댁에 방문하여서 인천에서 오랫동안 지내신 할머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할머니는 그때의 시간을 굉장히 무섭고 힘든 기억으로 간직하고 계셨다. 할머니의 아드님 (팀원의 큰외삼촌)께서 당시 학생운동을 하셨고 그때문에 집에 경찰들이 상주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연락도 할 수 없어서 가족 모두가 힘든 시간을 겪었던 과거를 떠올리시면서 눈물이 고이는 할머니 모습을 보니까 우리 또한 뭉클해졌다.


그때 외삼촌을 잡으러 집에서 지냈던 경찰들이 이제는 할아버지의 칠순잔치에도 오시고, 명절때에도 들려서 선물세트를 두고 갔다는 말을 듣고 신기했다. 외삼촌에게 그때 미안했다고, 학생운동 해주어서 고맙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당시 공권력의 유지를 위하여 죄 없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고문하던 그 사람들또한 결국 역사의 희생자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당장 성평등 노동 <한국여노 31주년 심포지엄>


개강으로인해 여행은 완료되었지만, 페미-워커-파이터의 일정은 그 후에도 하루 더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함께해온 ‘한국여성노동자회’의 31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9월 4일에 다녀왔다. 한국여성노동자회는 80년대 이후에도 여성노동운동이 지속될 수 있도록 87년에 설립되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여성노동자회는 그간 10년의 활동을 돌아보고 앞으로 성평등 노동을 이야기하였다. 여성노동자회에서 활동가로 일하시는 분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서 더욱 풍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평소에 알지 못했던 여성 노동 운동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는 귀중한 자리였다. 특히 돌봄 노동자 운동의 과거사를 들으며, 내가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끔 일일직으로 오시던 설거지만 하시는 아주머니들이 떠올랐다. 매장의 누구도 그분들의 노동환경을 신경쓰지 않았다. 나조차도 가끔 당연하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고, 그런 과거가 떠오르며 반성하는 마음또한 가지게 되었다. 사회는 우리를 자꾸 무디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무뎌지는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고 다시 다짐하였다.


짧았던 여행을 마무리하며


노동자운동은 우리의 삶과 가장 큰 관련을 가지지만, 동시에 가장 큰 외면을 받고있는 운동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나 한국의 20대는 더욱 더) 노동자와 자신의 삶을 분리한다. 그러나 사회는 노동자로 유지되어있다. 노동자의 불편함이 곧 국민들의 불편함이고, 노동자의 행복이 곧 국민들의 행복인것처럼, 나는 노동자의 역사가 곧 나라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여행을 다녀오며 노동자, 특히나 ‘여성 노동자’가 얼마나 소외되어있고 역사와 정책에서 주변화되어있는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여성주의자의 시각으로, 예민하고 불편한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하였다. 우리의 손으로 직접 성취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