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기원전 2333년 세워진 고조선을 시작으로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지만 항상 빛나는 모습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을 받아 내정 간섭을 받았고 조선시대 청나라에 굴복하는 삼전도 굴욕을 겪기도 했다. 특히 20세기 초반, 일본에 식민통치를 받으며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에서 가장 크고 아픈 상처를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발전해왔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약 70년 간 꾸준히 성장했고 지금은 민주주의 국가로서 세계 선진국으로 발전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강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열사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수많은 국민들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 10~20대 중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 소중함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 팀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신 모든 분들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역사를 잊은 못난 조상이 되지 않고자 이번 공모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2018년은 故 장준하 선생이 탄생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시작과 장준하 선생의 발자취를 돌아보기로 했다.

대한민국정부는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되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시작된다. 1919년 이전에는 한성을 비롯하여 만주, 연해주 등 여러 지역에서 각자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9년 3월 1일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해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 바로 3·1운동이다. 즉, 지금의 대한민국의 민주화의 시작은 3·1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알아보고자 우리는 3·1운동과 관련된 곳을 가장 먼저 탐방하기 결정했다.

그 전에 3·1운동이 어떤 것인지를 짚고 갈 필요가 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운동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의 탄압에 강력히 저항하고 한반도의 독립을 외치는 운동이었다. 각계각층의 대표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이 종로에 위치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실시하였고, 탑골공원에서 실시한 만세 삼창 운동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일제는 각종 무력을 휘둘러 우리 민족을 탄압했다. 비록 운동을 진압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여러 지역에 설립되었던 임시정부들이 하나로 합쳐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독립운동의 분기점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시작이 된 3·1운동의 시작이 된 곳을 방문하기로 했다. 때마침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이 2019년 3.1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100년 역’이 되었고 역사 내에 3.1운동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발전과정, 이와 관련된 장소들이 안내되어 있었다. 시간상 전부 돌아볼 수 없어 가장 주요한 장소인 중앙고등학교와, 손병희 집터, 탑골공원 등을 방문했다.


<안국역 내에 설치된 3·1운동 청색지도. 3·1운동과 관련된 장소가 보기 쉽게 안내되어있다>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중앙고등학교다.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6월에 개교한 학교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된 구한말에 신학문을 통한 교육구국(敎育救國)·교육입국(敎育立國)의 취지에서 기호지방의 우국지사들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사실 중앙고등학교는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중앙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을 국내에 알리고 3·1운동을 비롯한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3·1운동이 이곳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 안으로 들어서니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과 현대식 건물이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가장 먼저 둘러본 곳은 숙직실이었다. 당시 중앙고등학교 학생들은 이곳에서 일본 유학생들을 만나 2·8독립선언의 계획을 전달받고 3·1운동을 계획했었다. 비록 지금의 숙직실은 본래 자리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복원된 것이지만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학생들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기에 충분했다. 다음으로는 중앙고등학교의 본관으로 이동했다. 드라마에서 보았듯이 학교의 본관은 미적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우리는 본관 앞에 있는 3·1운동 책원비에 눈이 갔다. 3·1운동 책원비는 3·1운동의 태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중앙고등학교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려주었다.


<중앙고등학교 본관, 아름다운 건물 외관에서 미적 아름다움과 더불어 당시 학생들의 애국심이 느껴진다>

<중앙고등학교의 숙직실. 사진의 건물은 복원된 것이나 3·1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의 얼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학교를 떠나며 우리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생들은 지금의 우리보다 어렸지만 조국을 위한 애국심 하나로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손병희 선생의 집터였다.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의 3대 교주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으며, 3·1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손병희 선생의 집은 민족대표들이 모여 3·1운동을 최종 논의한 곳이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이미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그곳이 손병희 선생의 집터라는 안내판만 존재했다. 역사적인 곳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허전한 장소였다. 조금 더 의미가 있는 것들을 설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탑골공원이었다. 이곳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들이 항일독립운동 행진을 시작했기에 커다란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탑골공원에 들어서자 3·1운동 기념비가 크게 세워져 있었다. 3·1운동을 기념하는 내용과 함께 기미독립선언서의 사본이 전서되어있었고 선언서의 내용이 기념비 주변에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기념비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그 내용을 전부 읽었다. 가슴속에 무언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공원 안쪽에 세워져있는 조형물들 때문이었다. 조형물들은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의 모습을 각 지역별로 조각해 놓은 것이었다. 대한민국 만세와 조국의 독립을 외치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총칼로 제압하는 일본군의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더불어 제암리 학살 사건 등 3·1운동과 관련된 사건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교과서에서 보던 사진들이 청동으로 조각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탑골공원을 뒤로 우리는 종로경찰서 터와 태화관 터로 향했다. 종로경찰서 터는 지금의 종각역 8번 출구 앞인데 아쉽게도 그곳이 경찰서 터였다는 안내판만 존재했다. 안내판에는 일제강점기 의열단의 김상옥 의사가 일제강점기 탄압의 대표적인 곳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손병희 선생 집터와 더불어 이곳 역시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부각이 잘 안 돼있는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후 바로 옆에 있는 태화관 터로 향했다. 태화관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한 곳이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태화관의 이름은 딴 태화빌딩에 세워져있었다. 다행히 이곳은 태화관 터라는 큰 비석과 함께 고동색의 벽에 기미독립선언서 내용이 전부 새겨져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서서 기미독립선언서를 속으로 낭독해보았다.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비석 역시 다른 터와 다르게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었고 방문한 사람들이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가슴속으로 느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태화빌딩 앞에 세워져있는 안내 비석. 이를 통해 이곳이 태화관이 있던 곳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태화빌딩 앞에 새겨진 기미독립선언문. 전문이 한글로 새겨져 있어 누구나 읽기 쉽게 되어있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보신각이었다. 아마 보신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야의 종을 치는 곳으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신각은 당시 3·1운동의 대중적인 중심지였다. 보신각이 가진 또 다른 의미를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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