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4 – 탐방기]

Ⅰ. 탐방기를 쓰기전에

 History 4(이하, H4)팀은 8월 23일부터 26일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탐방을 떠났다. 학생이고 과거 군인이었던 자신들을, ‘과거의 학생운동’과 ‘군대와 관련된 사건’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속한 집단과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했다. 탐방의 목적은 한 마디로 ‘정체성 찾기’였다. 사회 속에서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 집 나간 역사와 우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하여 H4는 역사의 현장으로 떠났다. 3박 4일 동안, 대구-광주-나주-여수-순천-부산을 다니며 참 많은 곳을 다녀왔다. 비록 태풍과 집중호우와 같이 다니면서 힘든 일정을 소화했지만, 아래의 20개의 공간은 하나하나의 모든 공간이 의미 있었다. 이는 우리에게 어떻게 남았을까. 답사기에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5.18 기념공원(5.18 기념회관, 5.18 기념재단), 5.18 자유공원,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구) 전남도청과 금남로, 전남대학교 5.18 기념관,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구) 나주역, 손양원 목사기념공원(손양원 목사기념관), 애양원, 마래터널, 형제묘, 만성리 학살지, 여수중앙초등학교, 순천기독교역사박물관, 동아대학교(6월항쟁 기념비, 6월항쟁도), 부산학생항일의거기념탑, 부산민주공원, 2.28 기념회관, 2.28 공원, 경북대학교 여정남 공원.

Ⅱ. 탐방기

ⅰ. 1일차

 1일 차는 대구에서 광주로 떠났다. 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여러 장소를 둘러보고, 광주의 학생들이 독립운동의 붐을 일으켰던 그 발상지와 그것을 기념하는 탑도 보기로 하였다. 하지만 태풍과 함께한 탐방 첫날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광주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5.18 기념공원이었다. 5.18 기념공원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인 5.18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광주광역시에서 1996년 조성하여 1998년에 완공되었다. 5.18 기념공원에 들어서면 강력한 민주의식이 잘 표현된 남자 세 명의 동상이 보인다. 그 동상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면 죽은 아이를 안고 울부짓는 여성의 동상이 나타난다. 어떤 이유든지 자식을 잃은 슬픔은 어느 것에 비할 수 없지 않을까. 또, 그러한 비극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무거운 마음을 지니고, 공원 내에 위치한 5.18 기념회관을 찾아갔다. 기념회관에는 기념재단과 관련한 자료들이 있었다. 5.18 기념재단은 1994년 이후 5.18 진상규명과 정신 계승을 위해 줄곧 노력해왔다고 한다. 자료를 관람하던 중 재단에서 일하시는 분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분은 5.18 관련해서 답사하러 왔다고 설명하자 광주의 주요 5.18 지점들을 알려주시며 교통편도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탐방에 많은 도움이 되어 지금도 팀원 모두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얘기해 드리고 싶다.

 기념회관을 나와서는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을 가둬두던 영창과 그들을 재판하던 법정, 계엄군의 내무반을 재현해놓은 5.18자유공원을 방문했다. 이때부터 바람도 세게 불고 비도 많이 왔지만, 입구에서 여러 가지 편의를 봐준 관계자분의 도움으로 무사히 다닐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유공원에 재현된 당시의 끔찍한 모습은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빠지게 했다. 검은 커튼을 열고 들어간 전시 공간에는 노약자와 어린이는 출입을 금지할 정도로 끔찍하게 훼손된 사체 사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어린 학생들을 이렇게 무참하게 살해한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후, 5.18 민주묘역으로 가려고 했으나 태풍의 영향으로 비바람이 거세지고, 택시기사님의 만류로 5.18 민주묘역을 포기하고, 점심을 먹고 나서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과 (구) 전남도청을 찾아갔다.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은 2011년 5월 영국 맨체스터에서 제10차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록된 5.18 관련 기록물들을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관리하는 곳이다. 기록관의 마지막에 있었던 포스트잇을 붙여서 한 마디를 전하는 곳에는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문구로 가득했고, 적잖은 감동을 주고 있었다.

 기록관을 나와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군부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던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계엄군에 맞서 싸웠던 전남도청은 아직도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혼이 서려 있는 듯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더 많은 분의 희생에 저절로 고개가 숙어지게 되었다.

 도청을 나와서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공원까지 걸어갔다. 걸어갈 때는 힘들었지만 학생운동의 산지에 와서 그를 기리는 탑을 바라보니 우리가 이 탐방을 시작하게 된 이유를 상기시켜주어 사회에서 우리의 역할과 정체성에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전남대학교 5.18 기념관으로 갈 때는 택시를 이용했는데, 알고 보니 기사님께서 5.18을 직접 겪으셨고 전남대학교까지 이동 하는 동안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기사님은 5.18이 발생하고 군인들이 들이닥칠 때, 친구들과 당구장에서 당구를 치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몰려와 카운터 직원을 개 패듯 패고 당구장 손님들을 1열 종대로 집합시켜서 끌고 나갔다고 한다. 기사님은 어떻게 탈출에 성공했지만, 친구 중 몇 명은 영창에 끌려가기도 하고 저항하다가 총을 맞은 친구도 있었다고 한다. 기사님은 너무 무서워서 집에 계속 숨어 있었는데 계속해서 빗발치는 총소리에 귀가 아득해졌다고 하셨다. 이렇게 경험하신 분에게 생생한 얘기를 들으니 그때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전남대학교 5.18 기념관를 돌아보고 찜질방에 들어가 하루를 돌아보면서 5.18민주화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을 통해 느낀 종합적인 감정을 마음속으로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지며 일정을 마무리했다.

 ⅱ. 2일차

 아침 일찍 찜질방에서 나와 나주에 있는 학생 항일운동 기념관으로 향했다. 기념관에 있으셨던 안내원분께서 관람순서를 알려주시고 이른 아침이라 우리밖에 없는 전시관에 영상도 준비해주셔서 수월하게 관람 할 수 있었다. 2층을 먼저 보고 1층으로 내려오는 순서로 구성되어 있었고 마지막에는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11.3 학생 독립운동에 대해 막연히 원인이 일본인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오늘 기념관을 관람하며 다른 많은 것들을 알수 있었다. 여학생의 비명을 듣고 조선인 남학생 박준채가 일본인 학생을 꾸짖었고 일본인의 ‘조선인 주제에’라는 말에 싸움이 벌어졌다. 이 모습을 본 일본인 순사는 박준채의 뺨을 때리고 한국인 학생들만 나무랐으며 이에 한일학생 간의 충돌은 더욱 켜졌다고 한다. 당시의 11.3일은 일요일이었는데 일본은 학생들에게 일왕 생일 축하를 강제하였고 이후 돌아가던 한일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 이후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광주에서 일어난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가 나주의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기념관을 나와 옛날의 나주역을 살펴보고 나주 학생들의 광주 통학 길을 따라가면서 3.1운동과 6.10만세 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3대 독립운동 중 하나였던 학생 독립운동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할 수 있었다.

 나주에서 여수로 이동하였다. 여수에서는 손양원 목사 기념공원을 방문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 노인분께서 반겨주셨는데 알고 보니 손동길이라는 손양원 목사님의 막내아들이셨다. 그는 손양원 목사님이 순교하신 그날에 태어나셨고, 태풍이 지나가고 무더운 이 날씨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아침 9시부터 앉아 있으셨다고 한다. 그분의 설명을 통해 우리는 손양원 목사님이 순교하던 당시 상황을 자세히 들었고 동상 앞에서 9개의 기도를 모두 같이 하나씩 읊어 보았다. 가슴이 찌릿한 순간이었다.

 손양원 목사 기념공원에서 나와서는 애양원을 둘러보고 여수 시내로 나왔다. 이후 학살의 현장이었던 마래터널과 만성리학살지를 둘러보고 여순사건 희생자들의 무덤인 형제 묘에도 다녀왔다. 슬프면서도 깊은 암운이 돌게 하는 오늘 하루였다.

 ⅲ. 3일차

 아침에 펜션에서 나와서 어제 답사했던 여수로 다시 갔다. 여수중앙초등학교를 방문했는데 여순사건 당시 옛날의 모습은 없었지만, 여순사건의 관련 지로서 안타깝게 죽은 일반 시민들의 희생에 대해 잠시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국방경비대 14연대의 제주 4.3사건 진압 거부를 이유로 발생한 여순사건은 안타까운 일반인 희생자들을 많이 낳았는데 우익세력과 우익경찰들의 ‘손가락 총’에 총살당한 일반인들의 희생은 민주주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여수를 떠나 순천으로 갔다. 순천역에서 자전거를 대여하여 순천 기독교 역사박물관으로 향했는데 산기슭에 있어서 자전거로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꽤 힘들었다. 박물관에는 어제 보았던 손양원 목사님의 희생에 관련된 전시물도 있었다. 그리고 해방정국 당시 극심한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고난을 겪은 기독교 순교자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할 수 있었다.

 순천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6월항쟁 기념비와 6월항쟁도가 있는 동아대로 향했다. 기념비는 동아대학교 승학캠퍼스 공과대학 뒤편에 자리해 있었다. 길은 나 있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서 많이 잊혀져, 기념비를 찾는 발길은 많이 없는 듯했다.

 이후 곧바로 6월항쟁도를 찾아 나섰는데 벽화가 덩쿨들 사이에 가려져 있어서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벽화가 풀 사이에 가려진 모습은 6월 항쟁이 가지는 큰 의미가 조금은 퇴색된 것 같아 아쉬웠다. 마지막 코스인 동아대학교를 나오면서 6월항쟁이 한국사에서 가지는 기념비적인 의미에 대해 다 같이 곱씹어보았다.

ⅳ. 4일차

 새벽부터 쏟아 내렸던 비를 맞이하며 숙소에서 나와 부산 어린이대공원으로 떠났다. 그곳에는 부산 항일학생의거를 기리는 기념탑이 있었는데, 이 기념탑은 1940년 11월 24일에 일어난 부산 항일의거를 기리기 위해 2004년 11월 23일에 건립되었다. 노다이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노다이 소좌가 한국인 학교를 차별하며 부당한 대우를 한 것이 시발점이 되어 한국인 학생들이 관사를 습격하기까지 이르렀는데 일제의 통제가 심했던 시기에 일어났다는 점에서 의의가 높다고 한다. 기념탑을 바라보며 H4 멤버들도 과연 그런 상황에 용기 내어 맞서 싸웠을까, 나라를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기념탑을 뒤로하고 부산 민주공원으로 향했다. 부산 민주공원은 민주화를 위해 큰 역할을 한 시민들의 숭고한 민주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이다. 민주공원은 가파른 언덕에 위치해 찾아가기 매우 힘들었지만, 4월 혁명과 부마항쟁, 5.18민주 항쟁, 6월 민주 항쟁의 민족성과 민주성을 상징하는 조형물들이 웅장하게 자리 잡아 분위기가 남달랐다. 민주공원 위쪽에는 민주 항쟁 기념관도 있었다. 기념관에서는 민주를 위해 살아왔던 항쟁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해방 이후 4월 혁명, 부마 항쟁, 5.18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 21세기 이후의 촛불시위까지 당당하게 이어지는 항쟁의 산맥들을 만날 수 있었고 관람을 끝낸 우리의 가슴속에서도 민주의 불씨가 타올랐다.

 

 부산에서 대구로 기차를 타고 이동한 후 비가 와서 옷이 젖었던 관계로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조금 휴식을 취하고 옷을 갈아입고 다시 2.28 기념회관 앞에서 만나서 탐방을 진행했다. 2.28운동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발생한 최초의 민주화운동으로, 3.15. 마산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어진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된 민주화 운동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나라 사랑의 귀감이 되는 대구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대구에서 학교에 다니는 H4로서는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확실하게 2.28민주운동을 알고 싶어서 전시관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펴보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이어서 버스를 타고 대구 동성로에 위치한 2.28 기념 중앙공원으로 이동했다. 시내 중앙에 위치해서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이렇게 민주로드 활동을 통해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깊게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2·28 기념 중앙공원에서 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앞에 위치한 여정남 공원에 도착했다. 여정남 열사는 유신정권 시기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희생자이다. 여정남 공원 앞에 서서 그 당시 여정남 열사가 가졌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과 생각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렇게 길었지만 짧았던 H4의 민주로드는 마무리가 되었다.


Ⅲ. 탐방기를 마무리하며

 사실 그렇다, 사학도인 우리는 대체로 기록에 의거하여 역사를 바라본다. 하지만 모든 언어가 그렇듯, 상황과 현실을 온전히 반영시킬 수 없다. 우리가 보는 사료라는 것은 다소 희석되고 정제된 어떤 기록이다. 어쩌면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건은 실제로 있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처절하고, 간절하고, 절실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현실에서 역사적인 현장에 가는 탐방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쉽고도 어려운 발상의 전환은 탐방 속에서 흔히 일어난다. 탐방을 다니면서 참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다. 여행하면서, 또, 살아가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도움을 주고받는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권리도 앞선 사람들의 도움을 통한 것이다.

 고마움, 미안함, 애잔함, 분노, 절망, 희망. 이토록 다채로운 감정부터 우리가 저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질문까지. 탐방하며 많은 것을 느꼈다. 탐방하고 나서 H4의 팀원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그럼에도 탐방 이전과 탐방의 이후의 우리는 다르며,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걸음을 내디뎠다 평가하고 싶다. 이후 탐방 보고서를 작성하며, 해당 지역과 사건에 대해서 더 깊숙이 알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내 자식은 이렇게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 더 좋은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강인함. 이것이 대한민국을 이토록 발전시켰고, 우리를 이렇게 살게 한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짧다고 하지만, 최근의 촛불이 웅변하듯, 그 짧은 역사 속에서 우리는 누구보다 뜨거웠고, 누구보다 따뜻했다.

 탐방을 지원해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감사와 다른 탐방팀의 안전하고 뜻깊은 탐방을 기원하며. 탐방기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