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필을 든 시민들
김경민, 이민지, 이지은, 정지수

1987, 고통스럽지만 찬란했던 기억을 따라
  
3박 4일 간 분필을 든 시민들 팀의 탐방 중 셋째 날 일정에서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이한열 기념관을 방문했다. 6월 민주항쟁의 진원지인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6월 민주항쟁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그리고 6월 민주항쟁 중 희생당한 이한열 열사를 기리는 이한열 기념관까지 견학하는 일정이었다. 3일차의 일정도 2일차와 마찬가지로 6월 민주항쟁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일정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군사정권에서 만든 간접선거를 직접선거로 바꾸어 대통령을 국민이 뽑도록 하라는 외침이었다. 이는 노태우의 6·29 선언을 이끌었고, 결국 헌법을 고쳐서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지게 된다.
먼저, 6월 민주항쟁의 진원지인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으로 향했다. 오전 9시경 출발하여 10시쯤 도착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초대주교 코프가 1922년에 착공하여 1926년 5월 2일에 완공한 화강석과 붉은 벽돌을 아울러 쌓은 조적조 구조의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다. 이곳은 6월 민주항쟁의 진원지로 19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던 사람들이 자주 모였고, 명동 성당과 함께 6월 민주항쟁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이다. 대한성공회 6월 민주항쟁 10주년 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에서는 1997년 6월 10일 유월 민주항쟁 십 년을 기념하여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앞마당에 ‘유월 민주항쟁 진원지 표지석’을 세웠다. 그리고 “유월 민주항쟁이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민주화의 새 역사를 열다”라고 알리고 있다. 전날 방문했던 명동 성당과 향린 교회에 이어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으로의 방문은 또 다른 의미 있는 경험이 되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유월민주항쟁진원지 표지석>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김경민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은 명동 성당, 향린 교회와 함께 6월 민주항쟁의 진원지입니다. 평범한 성당이라고 생각했던 이곳도 6월 민주항쟁의 진원지라고 하니 많은 성당과 교회들이 당시에는 종교적 의미를 뛰어넘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민지

6월 민주항쟁의 진원지였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을 방문하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서울 시청과도 가까운 서울의 중심지인 이곳에서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다는 상상을 하니 뭉클했습니다. 

이지은

명동 성당, 향린 교회에 이어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에도 방문하였습니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모여 힘을 합쳤다는 것이 놀랍고도 감동적이었습니다. 현재에도 많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목소리가 모이는 곳이라고 하니 의미가 더 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지수

6월 민주항쟁에 대해서는 고등학생 때까지 많이 배웠고, 항쟁을 했던 곳에 관해서도 공부해보았지만 진원지는 탐방을 통해 처음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민주화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을 이번 기회에 방문하게 되어 뜻 깊었습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에서 한 시간의 관람을 마치고, 11시에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출발했다. 11시 반 경에 도착한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서는 가장 긴 관람 시간을 가졌다. 넓은 규모의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보아야할 것들도 기억해야할 것들도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서대문 형무소는 1908년 10월 21일,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개소되어 1945년 해방까지 한국의 국권을 되찾기 위해 싸운 독립 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장소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군정과 경찰의 폭압으로 일어난 4·3 사건의 제주 주민들과 6월 민주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억울하게 수감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서울까지 끌려간 제주 출신 4·3 수형인들은 혹독한 수감 생활을 견뎌야 했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4·3 수형인 명부’와 1951년 법무부 감찰과의 ‘탈옥수명단’ 등에 따르면 적지 않은 제주도민이 서울까지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는 1948∼1949년 당시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끌려가 수감됐던 4·3 사건 관련 피해자 기록물이 많이 빠져 있다는 한계점이 있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과거의 아픔과 그 극복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자 1998년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개관하여 자주 독립정신과 자유 평화수호 정신을 기리는 교육의 현장으로 운영되고 있는 점은 바람직했다. 하지만 국가가 잘못했던 역사 또한 미래 후손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이고,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올바르게 전시해야 할 것이다.
서대문 형무소의 옥사는 현재 독립운동가와 민주운동가들을 기리는 전시실로 이용되고 있었다. 당시에는 극악하고 잔인했던 옥사가 현재는 그들을 기리는 전시실로 이용되고 있는 점이 인상 깊었다. 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주운동가 전시를 보던 중,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의 삶도 엿볼 수 있었던 점이 인상 깊었다. 또한,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는 건물의 지하에는 당시의 고문 현장을 재현하여 체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던 산 증인들이 증언하는 영상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직접 당시의 서대문 형무소의 잔인함을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당시의 고문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보면서 우리가 기억하고 잊지 않아야 할 역사의 한 부분을 되새길 수 있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묵념의 시간>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김경민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은 탐방 기간 중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둘러본 곳입니다. 수감실과 고문실 그리고 사형실을 둘러보니 온 몸에 소름이 돋았고,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2010년이 되어서야 정비되어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고 하니 정말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난 게 고작 몇십년 전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습니다. 서대문구에 있는 학교에 다니면서 이런 곳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냈던 지난 날들이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이민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서 끔찍했던 역사의 한 장면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독립 운동가와 민주화 운동가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셨던 분들이 투옥하여 온갖 고문을 겪으셨던 곳을 직접 방문해보니 그 감회가 아주 컸습니다. 특히,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운동가를 기린 방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 자살 이후 ‘노동자의 어머니’라고 불리며 노동 운동을 주도해오신 분의 업적을 보며 다시 한 번 민주화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지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은 제가 초등학생 때 방문해본 곳이었습니다. 약 10년이 지난 뒤에 다시 찾아가보니 기존에 남아있던 기억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습니다. 일제시대 부터 많은 독립 운동가들과 1900년대 후반 민주열사들이 수감된 장소는 지금 봐도 너무 끔찍하고 무서웠습니다. 아픈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슬픔을 겪지 않도록 노력해야할 것입니다. 

정지수

독립투사의 열망을 담고 있다고 알려진 서대문 형무소가 민주열사의 열망 또한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좋았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이 물론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서대문 형무소에 민주화에 대한 내용은 자세히 적혀있지 않은 것이 아쉬웠습니다. 이번 기회로 많은 사람들에게 서대문 형무소가 민주화의 열망 또한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이한열 기념관은 이한열 열사의 유품을 비롯한 1987년 6월 항쟁의 기록을 보존하고, 연구하며, 전시를 통해 민주주의의 역사를 교육하는 박물관이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가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과 시민 성금으로 2004년에 세워졌으며, 2014년 사립 박물관으로 새롭게 개관하였다. 방문 당시 이한열 기념관 1층에는 ‘1987, 세상을 바꾸다’라는 특별 전시도 열리고 있었다. 6월 민주항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1987>과 함께 이한열 열사의 삶을 소개하는 전시였다. 전시를 관람하며 영화 촬영 시 이한열 열사를 재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실제 소품들을 구경하고, 그 의의를 되새겨볼 수 있었다. 2층에서는 이한열 열사를 기리는 상설 전시가 있었는데, 여기서 이한열 열사가 6월 민주항쟁 당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당시 실제 착용했던 옷, 안경, 신발 등의 유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한열 기념관으로의 방문을 기점으로 하여 팀원들이 재학 중인 홍익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근처에 있는 연세대학교를 지나칠 때 현재의 안정적인 대학 생활을 위해 힘써준 이한열 열사가 생각날 것 같았다. 이한열 기념관에서의 탐방을 끝으로 3일차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이한열 기념관>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 열사>


이한열 기념관

김경민

영화 <1987>의 주인공인 이한열 열사의 기념관에 방문했습니다. 이한열 열사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근처에 있는 기념관에는 그의 물건들과 옷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영화 1987의 소품들이 있었습니다.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을 당시의 옷이 전시 되어있었는데, 그의 얼룩진 옷에서 참혹했던 현장이 느껴졌습니다. 우리 또래 민주열사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절대 잊지 않겠다고 또다시 다짐했습니다.

이민지

이한열 기념관은 신촌의 조용한 골목 한 곳에 있었습니다. 대학가로 시끌벅적한 신촌 변두리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와 같은 학생 신분일 때 민주화 운동에 참가하고 가슴 아픈 희생을 당한 이한열 열사의 유물을 보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지은

이한열 기념관은 연세대 상경대학 경영학과였던 이한열 열사를 기억하기 위해 연세대학교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한열 열사가 시위하던 때에 입었던 옷과 사용하던 물품 등이 전시되었던 것을 보며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생생하게 상상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동생, 어린 조카가 이한열 열사에게 남긴 메시지를 보고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대학생의 신분으로 대한민국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던 이한열 열사의 희생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새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정지수

영화 <1987>을 보고 이한열 열사가 친구의 품에 안겨 쓰러진 마지막 장면이 인상 깊었는데 오늘 기념관을 가보니 그 기억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나도 모르게 항상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익숙해지는 것을 보니, 언젠간 나도 무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교사가 된다면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라는 가치의 소중함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주는 노력을 해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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