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민주야 여행가자 답사기>


‘민중’이라는 이름의 역사 - 46년 대구, 80년 광주, 세월호 이후의 사람들


공명(共鳴)

박상현, 고영현, 변다빈, 윤준식

2018.8.17.~20.


출발하기 까지


같은 대학, 같은 반(과와 비슷한 반이라는 공동체가 있다), 같은 학생회에서 비슷한 대학생활을 보낸 친구들이 있다. 각자의 영역에서 학생들의 공동체를 꾸려나갔고, 대안적 놀이를 상상했으며, 때로는 싸웠다. 그러면서 삶의 정치와, 정치의 주인공인 ‘사람’을 고민했다.

친구 두 명은 입대한 후 한참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큰맘 먹고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와중에 ‘민주야 여행가자’라는 사업이 들어왔다. 우리의 여행을 조촐히 자축할 겸, 그동안의 고민을 돌이켜볼 겸 신청했다.

대구, 광주, 목포는 사실 우발적으로 선정되었다. 다빈과 상현의 고향인 대구와 목포, 거기에 작년에 5.18 답사 겸 다녀갔던 광주를 얹었다. 연결해놓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구와 광주 모두 ‘민중항쟁’이라 불리는 역사의 장소였다. 한편 목포는 1980년 광주항쟁의 범위에 들었을 뿐 아니라, ‘세월호’라는 새로운 고민이 담긴 상징적 장소였다.

항쟁의 흔적이 사라지고 보수의 성지로 떠오른 대구, 항쟁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이유로 이를 신화화하는 광주, 항쟁의 중심지에서 벗어난 지역 도시이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고민을 던지는 목포. 꽤 괜찮은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현장의 삶을 들려줄 우리의 부모님도 계셨다.



2018.8.17. 대구 (대구역 인근, 2.28 기념문화관 등)



동대구역에 12시 10분이 넘어 도착했다. 사실 하루 종일 다닐 대구의 구도심은 예전부터 있던 기차역인 대구역에 가까이 있고, 오늘 잘 다빈 집에도 대구역이 더 가깝다. 하지만 나중에 지어진 동대구역에만 ktx가 정차하고, 일부 인원이 서울에서 ktx를 타고 좀 더 늦게 출발하기에 같이 만나서 가려고 동대구역을 택했다. 콩국수를 먹는 것으로 첫 답사 일정이 시작되었다. 콩국수는 아예 밍밍하게 먹거나 설탕을 뿌리거나 소금을 뿌리는 등 지역마다 간을 하는 방식이 꽤 다양하다. 우리가 먹은 대구 콩국수는 소금으로 간을 해주는 것 같았는데, 위에 고기 다진 것도 놓여 있어 꽤 짭짤했다.

식당에서 나와서는 근처에 있는 답사 지점들을 차례차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대구의 구도심 위치인 만큼 옛 골목이나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장소들이 많았다. 최근 대구시는 ‘근대路의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여 근대 골목 투어를 열심히 홍보하고 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있었던 것 같은 건물들이 꽤 있었다. 그뿐 아니라 몇 십 년 되고 다소 낙후된 가게들과 현대적인 감성의 가게들이 함께 있는 모습들도 흥미로운 풍경들을 연출했다.

우리가 대구에서 집중한 역사는 ‘2.28 학생민주의거’와 ‘10월 항쟁’이었다. 대구에서 촉발된 2.28 학생운동은 이승만 자유당 독재에 맞서 싸운 저항 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으로 제법 알려진 운동이다. 최근 문재인 정권에서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기도 했다. 대구에서 공식적으로 적극 홍보하고 기록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이승만 독재에 대한 내용은 초중등교육 교과서에서도 잘 실려 있는, 합의가 비교적 잘 이뤄진 내용이기에 그럴 것이다.

반면 10월 항쟁은 거의 잊힌 역사다. 우리도 사실 작년까지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항쟁이었다. 작년에 대학교 친구들이 함께 학생회 세미나를 대구에서 진행했을 때 알게 되었다. 당시에 다빈 부모님이 대구 근대 골목을 구경시켜 주시면서 10월 항쟁에 대한 얘기를 언급하셨던 것이다. 이에 흥미를 느껴 이번 답사를 계기로 더 공부해보고자 다루기로 했다.

10월 항쟁은 10.1 사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직 나라가 제대로 세워지기 전인 1946년 미군정 때, 당시 대구부에서 시작된 민중봉기이다. 좌우 이념 대립도 극심하던 때인 만큼, 총기 발포도 많이 있었고 물리적 충돌과 피해 규모가 컸다고 한다. 당시 조선공산당의 영향도 있었고, 여러모로 소위 ‘급진적’이라고 볼 만한 사건이기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국가 차원에서는 이를 제대로 되짚어보지 않은 것이다.


일정 중에 대구시립 중앙도서관이 가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흥적으로 방문하기도 했다. 대구의 정치색에 대해 이전에 희미하게 알던 내용을 책을 통해 잠시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은 보수적인 정치색을 가진 도시로 인식되지만, 흥미롭게도 대구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좌파적인 도시였다. 이 성향이 크게 바뀐 계기 중 하나는 박정희 정권 때의 사법살인으로 유명한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당시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을 하던 사람들과 조직들은 대구에 거점을 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대법원에서 판결을 받은 18시간 만에 사형 집행이 이뤄졌다. 이후 박정희 정권 시기를 지나면서 대구경북은 점차 다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저녁 식사 전까지 다닌 곳들 중 대부분은 2.28 운동이나 10월 항쟁과 관련된 역사적 장소들이었다. 이전에 중앙경찰서였던 자리는 지금도 중부경찰서가, 의전이었던 장소는 경북대학교 의대 및 간호대가, 우정국이었던 곳은 우체국이 있는 식으로 옛 모습이 그대로 계승된 곳이 많았다. 골목들 형태들도 상당히 그대로 남아있는 편이었다.


2.28 기념 공원, 경상감영공원, 국채보상운동 기념 공원 등을 방문하면서, 대구에는 크고 작은 공원이 도심에 참 많다는 것을 느꼈다. 정작 대구 출신 일행들은 지금까지 살면서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던 부분이었는데 듣고 보니 그렇다고 했다. 낯선 외지인의 눈으로 볼 때 보이는 것들도 많은 것 같다.

10월 항쟁에 대한 연구는 이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교과서 등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대구 차원에서도 제대로 된 기념 장소 하나 없는 상태였다. 때문에 2.28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대구가 얼마나 강조를 하는지를 크게 느낄 수 있었고, 국가와 공공기관에 의해 민주화 운동이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는지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반면 10월 항쟁에 대해서는 찾을 수 있는 정보가 얼마나 적은지 새삼 실감했다. 어디든 여행을 다니면서 관광지, 유적지, 박물관 등을 체험할 때, 그곳에서 보기 좋게 정리해 제시해주는 것을 충분히 느끼는 것도 물론 소중하다. 하지만 무엇을 빠뜨리고 있고 가리려 하는지, 어떤 시각과 맥락으로 다루는지를 생각해보는 게 어렵지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다빈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출판사를 방문했다. 도서출판 한티재는 대구에서 인권, 환경, 사회운동 등에 대한 책을 내고, 공부하는 모임과 행사를 개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들을 보면서, 정치, 문화, 사회 등 거의 모든 것의 중심지가 서울인 한국의 현실을 다시금 생각했다. 이후 납작만두를 간단히 먹고, 대구에서 유명한 막창으로 밤 늦게까지 다빈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했다. 대구의 시민운동에 대해 여쭤보자, 부모님은 직접적으로 경험하셨던 1987년 6월 항쟁과 이후 대구 지하철 참사의 기억을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지금은 전국적인 집회 등이 있을 때, 광화문을 많이 의식하는 듯한 대구 사람들이 다소 아쉽다고 말씀하셨다.



2018.8.18. 광주 (전남대, 구 전남도청, 금남로 등)

처음에 답사 일정을 계획하면서 대구와 광주를 같이 넣었다. 일반적으로 이 둘의 조합은 지역 대립 구도를 떠올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두 도시는 각각 10월 항쟁, 광주에는 광주민주항쟁이라는, 대규모 운동이 촉발된 곳이라는 공통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운동이 기억되는데 있어서 극단적인 차이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먼저, 이 두 민주화 운동에는 비슷한 점이 몇 가지 보인다. 두 운동 모두 강력한 공권력의 탄압을 받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며, 민주화 이전까지는 사건 자체를 언급하는 것이 어려웠다. 두 민주화 운동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구호와 내용에도 불구하고, 운동이 계획을 가지고 전개 되었다기 보다는, 우발적인 시위와, 이에 대한 진압이 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 항쟁으로 촉발되었다는 공통점 역시 흥미롭다. 시위의 구성원 역시, 빈민과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많이 참여했으며, 시위 직전 상황에서 정부에 대한 반대 활동을 주도했던 지식인들(10월 항쟁의 경우에는 조선 공산당, 광주민주화운동의 경우에는 학생조직)이 시위를 주도하지 못했다는 점 역시 비슷하다. 민주주의 운동의 기반이 취약했던 역사적 상황과, 빈곤의 절박한 현실에 대한 분노가 결합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다른 점 역시 존재한다. 10월 항쟁은 대구에서 시작되어서 경북, 호남 지방, 그리고 전국적인 소요로 이어졌다. 이에 비해 광주 민주화 운동은 계엄군의 봉쇄에 의해 광주 전남 지방에 확산되는데 그쳤다. 10월 항쟁은 보다 전국적인 시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좌익 세력 숙청과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로 인하여, 기록과 기념물이 매우 적은 상황이다. 이에 비해, 광주 전남 지역을 제외하고는 학생운동세력에게만 알려져있던 광주민주화운동은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된 투쟁으로 인해 특별법 제정이 이루어졌고, 유공자에 대한 보상과 기념 사업이 부분적으로나마 이루어졌으며, 87년 민주화를 선행한 운동으로서 국가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를 보여주듯, 우리가 먼저 둘러본 대구에서 10월 항쟁의 흔적을 찾아 보기 어려웠던 것과는 상반되게, 광주에는 민주화 운동 당시의 장소가 상대적으로 많이 보존되어있었다. 우리의 답사는 그 중 전남대학교와 구 전남도청을 들렸다.



전남대는 광주민주항쟁이 시작된 곳이며, 시위 기간과 그 이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5.17 계엄 확대와 동시에 진행된 전국 대학교 휴교령에 항의하기 위하여, 전남대 학생들 수백여명이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시위를 하였고, 이에 전경들이 진압하자, 시위는 이후 광주 시내로 확산되어 전개되었다. 전남대는 시위 참가자들 일부의 시신이 계엄군에 의하여 매장된 곳이기도 한다.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이후에는, 전남대학교 학생 사회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과, 광주 민주화 운동 기억 투쟁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렇기에 전남대 내에서도 민주화 운동 기념물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전남대 출신으로서 들불야학운동을 하다,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을 맡았고,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사망한 윤상원 열사 흉상.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도피 생활을 하다 잡혀 옥사한 박관현 열사 흉상을 볼 수 있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통일, 반외세운동으로서 해석한 1990년대의 벽화 역시 인상적이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이후, 운동의 실패를 미국의 독재정권 비호에서 찾은 당시 학생 운동 세력의 인식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전남대에서 이후에 우리가 들린 곳은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 지금의 아시아 문화 전당이었다. 아시아 문화 전당은 크게 옛 전남도청 건물을 재활용한 5.18관련 유적지 및 민주화 기념관과, 문화 전시 공간으로 나눠저 있는 곳이다. 옛 전남도청은, 금남로와 중앙 분수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시위가, 군대와 경찰의 발포에 분노하여 점거하여, 이후 시위의 거점으로 이용된 곳이다. 시민군과 계엄군이 직접적으로 충돌하였으며, 계엄군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시민군을 잔인하게 학살한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도심의 매우 넓은 면적을 상업적인 이용을 배제하고 민주화 운동 기념 및 문화 공간으로 만든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작용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숙연해졌다. 또 이러한 민감한 상징성 때문에, 지난해 광주에 들렀을 때에는, 전남도청을 온전하게 보존할 것을 주장하는 시민단체가 기념관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고 있기도 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 같이, 전국민이 아는 역사적 사실 속에서도, 어떻게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해야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었다.

광주는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도심의 중앙에 전시하는, 강력한 자부심을 느끼는 도시라는 것을 답사를 통해 실감할 수 있었다. 매년 금남로에서는 광주민주항쟁을 기념하는 행사가 대규모로 열리며, 광주시에서 민주화 유적지를 정리하여 지도를 통해 안내하고 있다. 오랜 세월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기념하고, 끊임없이 되새기려고 하는 노력과 그 어려움을 느끼는 기회가 되었다.



2018.8.19. 목포 (목포근대역사관, 목원동 일대, 목포역 등)



늦은 밤 목포에 도착하자마자 택시기사님의 사회에 대한 일갈을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통해 전해 들었다. 목포에 대한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한 장면이라 재밌으면서도, 목포 사람들의 지역과 사회에 대한 정치적 자부심을 엿본 거 같기도 했다.

이튿날은 하루 종일 상현의 아버님께서 차를 운전해주셨다. 덕분에 현지인의 소개를 받으며 목포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의 주제와 꼭 부합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곳에 들렀고, 이날 하루만큼은 목포라는 ‘지역’에 더 주목하게 되기도 했다.

가장 먼저 들른 근대역사관 1, 2에서 우리는 근대 개항지 목포의 빛과 그늘을 동시에 마주했다. 식민지 일본의 상인과 거류민들이 주도하는 부, 그 속에서 착취당하고 투쟁한 부두노동자와 사회운동단체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러나 50년대까지 빼곡한 목포의 역사 속에 현대는 없었다. 거꾸로 말하면 목포의 현대를 견인할 ‘사람’과 공동체가 아직 없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씁쓸한 생각을 했었다.


목포 곳곳에는 5.18 사적지가 있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항쟁의 고립을 막고, 무기를 공수하기 위해 시민군은 전남 각지로 이동했다. 이에 호응하여 동조 시위가 전개되었는데, 목포는 동조시위가 가장 강하고 오랫동안 지속된 곳이다.

근대역사관2는 과거 일제 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였다가, 군부정권에 들어서는 헌병대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5.18 참가자들은 이곳에 감금, 고문당했다고 한다. 외견상 민족이 해방되더라도, 민중의 삶은 국가를 비롯한 기득권의 권력에 의해 착취당하고 억압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오래된 건물에 새겨져 있었다. 목포 청년회관은 일제 강점기에 신간회와 청년운동의 산실 역할을 했다. 현재는 극단 갯돌의 연습실로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가 방문했을 때도 극단이 마침 공연을 연습하고 있었다. 상현 아버님의 말씀에 의하면 갯돌은 80년대에 목포에서 활발하게 문예운동을 전개한 단체라고 한다. 한편 구 동본원사 목포별관은 일제강점기 지어진 일본식 사찰로, 이후 오랫동안 목포 중앙교회로 운영되었다. 덕분에 광주 항쟁 당시는 물론 6월 항쟁까지 목포 시내 시위대의 도피처이자 지도부의 회의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역시 상현 아버님의 기억에 따르면 목포 과학대, 목포대, 목포 가톨릭대 등에서 출발한 학생 대오가 여기저기 행진하다가 목포역에서 모여 집회를 진행하고, 중앙교회에서 행진을 마무리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근대역사관 2관과는 반대로, 지배 권력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던 해방과 투쟁의 공간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


저녁에는 친구들과 평화광장에 가서 바다분수를 지켜봤다. 상현이 유치원에 다닐 때만해도 미광광장이었던 광장의 이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이후 ‘평화광장’이 되었다. 마침 서거 8주기를 맞아 김대중 평화문화제를 알리는 플랜카드들이 붙어있었다. 김대중이라는 대형 정치인의 영향력을 여전히 느끼게 해주었다. 목포역 광장의 5.18 동조시위에서 주요하게 울려 퍼졌던 구호가 ‘김대중 석방’이었다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다.

숙소에 돌아와 야식을 먹으며, 상현 부모님과 목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목포에서 느꼈던 5.18, 그 분들의 대학시절 등이 주제였다. 5.18 당시 시민군들이 창문 깨진 버스를 두드리며, 총을 흔들며 거리를 누볐다는 초등학생 시절의 기억을 듣는 것은 참 묘한 경험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지점은, 두 분 모두 어려서 ‘전두환’은 누군지 몰라도 ‘김대중’은 알았다는 것이었다. 항쟁의 순간, 수많은 사람이 보편적 대의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각자의 다양한 이유를 가지며 역사를 여러 갈래로 그려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대학시절 목포대학을 중심으로 한 대정부투쟁, 이를 바라보는 비운동권의 시각, 여성 학우들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그들이 짊어진 불안정 고강도 노동 등의 이야기는 한국 현대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평범하지만 역사책에 기입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가, 혹은 역사책의 한 줄을 겨우 써넣을 수 있었던 이야기가, 어쩌면 앞으로를 살아갈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제는 작은 지방 소도시가 되었지만, 목포의 사람과 공간 곳곳에는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거치며 새겨진 슬픔과 자부심이 뒤섞여 있었다. 상현은 여행 후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말을 남겼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쇠락해가는 중소 항구도시. 어민들의 삶과 섬사람들의 향기가 무겁게 얽혀있으면서도, 신도심의 젊은이들과 젊은 가족, 윤기 있는 주택들과는 괴리되어 있는 곳. // 김대중의 영화를 떠나보내고 박지원의 그림자를 못마땅해 하며 붙잡고 있는 곳. 광주의 기억을 공유하면서도 자부심을 갖기는 쑥스러운 곳.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듯한 착각 속에 빈집이 늘고 새 아파트가 눈치 없이 들어서는 곳. 그렇게 누더기가 되어가는 곳.”

그렇지만, 여전히 목포를 기억하고 바꿔가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2018.8.20. 목포 신항


숨 가쁘게 달려왔던 탐방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일정은 ‘목포 신항’ 단 한 군데였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길의 분위기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상현이 아버님의 차를 통해 목포 신항으로 들어서자 온 국민이 수년 동안 봐왔던, 그리고 앞으로도 그 의미를 기억해야할 노란 리본이 길거리 양 옆에 가득했는데, 그 길의 끝에는 2014년 4월 16일 침몰하여 지금은 선체조사가 진행 중인 세월호가 인양되어 있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은 바다와 나란히 서있는 선체의 옆 부분이었다. 엄청나게 녹슨 부분이 있는 반면 침몰 이전의 모습처럼 선미가 흰색과 파란색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을 보면 바다 밑 갯벌에 파묻혔던 선체가 상대적으로 온전히 보존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세월호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날짜가 주말로 한정되어 있어 경찰들의 제지로 인양 장소까지 가보지는 못했다. 출입 마지노선 옆의 세월호 유가족이 지내는 컨테이너, 미수습자 5명의 사진, 당시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의 단체 사진, 4년이 넘는 세월을 기록한 사진전을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2014년 4월 16일의 대학생 1학년이었던 나는 뉴스 속보로 뜬 사고와 번복되는 기사, 그에 따른 안도와 불안감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300여명의 목숨이 걸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의 정부의 무능한 대처가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재앙이 되었고, 제대로 된 진상규명 없이 사건을 수습하기에는 내가, 우리가, 시민들이 참지 못했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세월호 진상규명 운동은 박근혜 정권 퇴진운동에 있어 시민들을 거리로 이끌어내는 동력원이 되었으며,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으로 대한민국 최초로 대통령을 탄핵시킨 ‘촛불 혁명’이라고 명명된다.



대구의 ‘10월 항쟁’ 및 ‘2.28 운동’에서부터 광주의 ‘5.18 민주화운동’과 비교했을 때 ‘촛불 혁명’은 상대적으로 비폭력적인 평화시위의 형태를 띤다. 국가권력이 언론을 은폐하는 것에 비해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이 확산되는 속도가 빠르다는 점도 과거의 민중항쟁과의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와 언론 또한 2000년대 이후의 시위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졌음을 인식해야 한다. 국가는 시민들의 분노를 잠재우는 것을 최우선목표로 하지만 과연 진상조사 및 후속조치가 잘 이루어지는지의 여부는 시민들의 기억에서 흐려지기 쉽다. 언론 역시 시위의 비폭력성과 비조직성에 주목하여 ‘자발적’인 시민들의 ‘평화적’ 시위라는 성격을 강조하는 동시에 시위를 사전에 계획하는 조직과 행렬 제일 앞에서 캡사이신과 물대포에 맞서는 이들을 소위 ‘주동자’라고 일컬으며 우상화된 시위의 성격과 대비시키기 일쑤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에서 생명권을 위협하는 것은 과거의 전쟁과는 다른 성격의 것들이다. 총과 칼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사지로 몰아가는 구조와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 소수의 목소리로 치부되는 현상이 민주주의의 모순으로 부각되고 있다. ‘공명’팀에게 이번 대구-광주-목포 여행은 제2의 세월호 참사, 제2의 구의역 사고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위해 민중항쟁이 나아가야할 길에 대해서 더 고민할 수 있었던 귀중한 답사였음을 느끼면서 글을 마친다.



관련 탐방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