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필을 든 시민들
김경민, 이민지, 이지은, 정지수

1일차 : 4·19 혁명의 순국선열과 민주열사, 그리고 전태일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며
  
3박 4일 간의 ‘분필을 든 시민들 팀’ 민주주의 탐방 여행! 그 첫 번째 일정은 서울에서 진행되었다. 이날은 4·19 혁명과 전태일 분신사건을 주제로 탐방을 진행했다. 먼저, 국립 4·19 민주묘지와 4·19 혁명 기념관, 그리고 근현대사 박물관에 방문하여 4·19 혁명에 대한 전반적인 공부를 하고, 당시 희생하신 순국선열들을 추모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한국의 노동 운동을 상징하는 전태일 열사와 관련된 곳인 평화 시장 앞에 위치한 전태일 거리와 창신동 봉제거리를 방문하여 당시 열악했던 노동자의 삶을 상상해 보고 전태일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가졌다.
분필을 든 시민들 팀의 첫째 날 일정은 서울에서 진행되므로 대구에서 서울로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우리 탐방의 첫 번째 일정이었다. 유적지는 정해진 시간에서만 관람이 가능하므로 최대한 일찍 서울에 도착해야 일정을 소화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팀은 아침 일찍 KTX를 타고 이동하였다. KTX는 만 24세까지 ‘청소년 드림’을 이용하면 약 30% 할인받아 새마을보다도 더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 우리 팀은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김밥을 먹으며 오늘 일정에 대해 미리 이야기를 나누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오전 9시경에 동대구역에서 서울역으로 출발하여 오전 11시경 서울에 도착했다. 숙소로 이동해 짐을 풀고 숙소 근처에 위치한 ‘로운 샤브’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로운샤브 홍대점>


점심 식사를 끝내고, 우리 팀은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근현대사 박물관, 국립 4·19 혁명 묘지, 그리고 4·19 혁명 기념관에 방문하였다. 이 세 곳은 모두 4·19 혁명과 관련된 곳이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 3·15 부정 선거에 항거하기 위해 각 지역의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1960년 4월 19일에 일어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의 정권퇴진 시위는 그 중 절정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확산되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까지 동원하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시위에 이승만은 더 버티지 못하고, 4월 26일에 하야성명을 발표하였다. 이후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열 수 있게 해준 4·19 혁명을 기리기 위해 당시 희생된 224분의 합동 분묘와 기념탑이 세워졌다. 이곳에서 우리는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고, 기념탑 앞에서 그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묵념을 하였다. 국립 4·19 민주묘지 안에 위치한 4·19 기념관에는 약 200여명의 당시 민주열사들의 사진과 4·19 혁명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어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국립 4·19 민주묘지>

<4·19 혁명 기념관>


국립 4·19 민주묘지

김경민

높디 높은 4·19 학생 의거 기념탑과 고요하고 넓은 민주묘지에서 숭고함이 느껴졌습니다. 200여개가 넘는 합동 분묘를 실제로 보니 그 무게가 더욱더 실감이 났습니다. 우리에겐 공기처럼 익숙한 민주주의가 절대로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이 분들의 희생으로 힘겹게 얻어졌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민지

국립 4·19 민주묘지는 경건한 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평화로운 쉼터 같은 느낌도 받았습니다. 민주주의를 외치던 분들의 쉼터가 바로 민주묘지인 것 같았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4·19 혁명 기념관 입니다. 그곳에서 4·19 혁명 당시 초등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매우 놀랐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이 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감명 깊었습니다. 

이지은

국가 혹은 공권력의 폭압에 의해 희생된 자들의 묘역을 방문하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넓은 4·19 국립 민주묘지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묻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놀랐고, 초등학생 희생자도 5명이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던 시민들과 대학생들의 노력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정지수

책에서 본 국립 4·19 민주묘지는 실제로 훨씬 더 엄숙한 분위기였습니다. 그 시대 그 사람들이 묻혀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묵념을 하게 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앞에 그 분들이 묻혀 계신다고 생각하니 책이나 TV에서 볼 때보다 민주열사들이 좀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4·19 혁명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우리보다 어린 많은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것을 보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컸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얻어낸 민주주의인 만큼 소중히 여기고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립 4·19 민주묘지에 방문 후 걸어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근현대사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1997년 4월 19일에 세워진 근현대사 기념관에서는 4·19 혁명을 포함한 다양한 근현대사를 배울 수 있게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의 역사가 전시된 이곳에서 우리 팀은 4·19 혁명과 관련된 전시실을 집중적으로 관람하였다. 권력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정의의 실현을 위해 몸을 바친 영령들이 계신 곳 근처에 있는 근현대사 기념관에서 우리는 민주 영령들과 민주혁명의 의의, 나라사랑, 보훈정신을 교감할 수 있었다.

<근현대사 기념관>


근현대사 기념관

김경민

일제강점기부터의 역사가 담겨있는 근현대사 기념관에서 우리는 4·19 혁명을 포함한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 전시관에서는 역사적 사실들을 딱딱하거나 어렵게 서술하지 않고,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구성하고 전시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또한, 도슨트가 청소년이었는데, 이는 도슨트 스스로도 설명을 해주면서 역사적 사실들을 각인 할 수 있게 되고, 배우는 학생들도 좀 더 흥미를 가지고 배우게 되는 것 같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민지

민주야 여행가자 탐방의 첫 방문지인 근현대사 기념관에서는 특히 청소년 도슨트가 운영되고 있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2층에서 책을 읽고 있는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니, 역사 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와 닿았습니다. 또, 특별전시인 ‘한 시대 다른 삶’도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박스 형태로 한 인물의 삶을 재현한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박스를 열어보며 정보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재미있게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울 것 같았습니다.

이지은

근현대사 기념관은 1900년대 초반의 일제 강점기 시기부터 4·19 혁명까지의 가까운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현대사에 비해 일제에 의해 탄압 받은 역사와 관련한 전시물이 더 많은 양을 차지하여 민주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기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전시되어 있는 당시의 직접적인 조각들을 살펴보며 과거의 실제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정지수

민주야 여행가자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간 근현대사 기념관은 과거에 어린 제가 가보았던 근현대사 기념관에 색다른 가치를 덧붙여준 느낌이었습니다. 근현대사 기념관을 통해 ‘민주주의’에 다가가게 된 과정을 알 수 있었고, 그 시대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또한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근현대사 기념관은 민주주의의 가치뿐만 아니라 동학농민운동, 3·1운동 등과 관련된 전시물도 보여주었기에 ‘자유’와 ‘평등’의 가치도 배우게 해주는 공간이었습니다.


근현대사 박물관에서 분필을 든 시민들 팀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전태일 거리와 창신동 봉제거리에 방문하였다. 전태일 열사는 한국의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전태일 열사는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동대문 시장에서, 17살부터는 평화시장에서 일을 했다. 일을 하면서 그는 차츰 어렵고 열악한 노동 현실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뒤늦게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정한 법이 있음을 알게 된 그는 동료들을 모아 ‘바보회’를 만들어 근로 기준법이 현실에서 적용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박정희 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는 1970년 11월 13일에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평화 시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경찰의 제지로 시위가 무산될 위기에 놓이자, 전태일 열사는 분신자살을 하였다. 그의 외침과 희생은 이후 우리나라 노동 운동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 몸을 불태웠던 청계천 6가의 ‘버들다리’ 위에는 2005년, 그의 정신을 기리는 반신 부조가 설치되었다. 이곳은 현재에는 엄격하게 지켜지는 근로기준법도 많은 사람들의 투쟁과 희생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전태일 열사를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다. 평화 시장의 이름, 주변의 아름다운 청계천의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대한민국 노동계의 슬픈 역사가 담겨있어 매우 안타까웠다. 우리 팀은 그 다리에서 우리와 같은 나이에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고 그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태일 거리>


전태일 거리

김경민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곳이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전태일 거리를 방문했습니다. 평화시장 바로 앞에 있는 전태일 동상에서 그의 억울함과 분노가 느껴졌습니다. 평화시장의 이름과는 너무나 대조되었던 당시 노동자들의 삶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우리와 같은 나이에 분신했던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며 우리는 과연 전태일 열사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그와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민지

전태일 열사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지만, 그 분이 분신하셨던 장소에 온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청계천 물도 흘러가고, 이제는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 조용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몇십년 전, 이곳에서 분신을 하셨다는 것을 믿기 어려운 풍경이었습니다. 다리 한 가운데 있는 동상을 보며, 우리와 같은 나이에 분신을 결심하셨던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지은

전태일 열사가 분신자살한 장소인 평화시장 일대를 방문했습니다. 아름다운 청계천에 대한민국 노동계의 슬픈 역사가 남아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22살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전태일 열사를 기억하는 모습은 바람직하고,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정지수

평화시장의 전태일 동상에 방문하였습니다. 우리와 같은 나이에 그 시대의 문제점을 느끼고 바꾸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후에는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마냥 어리다고 생각할 것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전태일 거리에서의 견학을 마친 후 창신동 봉제거리로 이동하였다. 원래 3일차에 예정된 곳이었지만 전태일 거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계획을 수정하기로 하였다. 창신동 봉제거리는 봉제공이었던 전태일 열사가 열악한 노동 환경과 처우에 항거하여 노동 환경이 개선되고 야간에 시장 내의 숙식을 금지시키자 봉제공들이 모여든 곳이다. 창신동은 동대문 시장, 평화 시장과의 접근성이 좋고, 봉제공장이 모여 있는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봉제공들은 평화 시장 옷 가게 뒤의 좁은 공간에서 겨울이면 난로를 피우고 쪽잠을 자고, 여름이면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찜통더위를 견디며 열악하게 일을 해왔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에 봉제공들이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창신동 봉제거리이다. 근현대사 박물관을 가는 길에 반대 방향 버스를 타는 바람에 일정이 한 시간 가량 늦춰졌다. 그래서 6시 이후에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에 도착해서 아쉽게도 이음피움 봉제역사관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의 창신동 봉제거리를 둘러보면서 우리 팀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나아졌던 봉제공들의 삶, 그 분들의 삶이 지금은 또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지도 궁금해졌다. 창신동 봉제거리를 마지막으로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1일차 탐방 소감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고, 편의점에서 재료를 사와서 간단하게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 탐방했던 곳들의 사진과 느낀 점을 정리하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며 오늘 일정을 마무리 하였다.


<창신동 봉제거리> <이음피움 봉제역사관>


창신동 봉제거리

김경민

6시 이전에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에 도착하기 위해 허겁지겁 오르막길을 뛰어갔지만, 6시 이후에 도착해 아쉽게도 내부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봉제거리를 걸으며 여러 가게들을 보았는데, 전태일 열사도 저런 일을 했겠다는 생각을 했고, 저분들은 노동환경은 얼마나 개선되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이민지

창신동 봉제거리에서는 흔한 골목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을 보았습니다. 고장난 듯 보이는 재봉틀, 커다란 봉지에 한꺼번에 묶여져 내놓아진 원단 조각들을 보며 이곳이 정말 봉제거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나아졌던 봉제공들의 삶, 그 분들의 삶이 지금은 또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이지은

전태일 열사의 희생 이후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된 창신동 봉제거리는 현재도 봉제거리로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거리를 걸어가면서 작업 순서를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는 재미있는 방식으로 봉제거리를 홍보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쉽게도 이음피움 봉제역사관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거리를 걸어가며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정지수

봉제 산업의 집적지라고 할 수 있는 창신동 봉제거리는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 거리의 주인공들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있었습니다. 이 거리를 통해 창신동의 특색 또한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에 가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창신동 봉제거리 자체를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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