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과 전라의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우리가 하나임을 배우고, 지역감정을 해소해나가는데 앞장설 수 있는 태도를 함양하고 싶습니다."



부경대학교와 창원대학교에서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은 학생들로 구성된 <민주로의 산책> 모둠의 한 모둠원의 이번 탐방 포부입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민주주의, 그 곳을 가다. (4.19혁명에서 6월 항쟁까지)`라는 제목으로 <민주로의 산책> 모둠은 지난 2016년 8월 12일(금)부터 15일(월)까지 3박 4일동안 부산, 마산, 세월호의 아픔이 있는 진도항, 광주 등을 탐방하고 돌아왔습니다.



현장탐방단 페이스북 방문자 게시물에 김세윤 모둠 대표가 매일 매일의 탐방코스를 아주 상세하게 올려 놓았는데요.



광주에서 시장 아주머니를 우연히 만나 직접 겪은 5.18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아프고 정말 내일인것처럼 슬픔이 차올랐다`는 탐방단원들의 이야기가 인상깊네요.



"이번 민주로드중 제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인 진도 팽목항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정말 멀고도 긴 시간을 쉼 없이 움직였는데요, 그만큼 많은 것들을 얻었을까요? 그 결과는 좀 더 자세한 내용과 함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좋은 기회 마련해 줘서 감사하다는 탐방단원들의 감사인사를 많이 받는데요. 천만에요.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구슬땀 흘리며 이렇게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2016 민주야 여행가자> 탐방단 여러분께 저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민주로의 산책> 모둠원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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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로드-민주로의 산책 【1일차】


▲부산대학교 제 1도서관 10월16일 부마민중항쟁탑 앞


 1일차인 오늘(15.08.12)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하루이지만, 민주로의 산책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첫 번째로 우리들이 가는 곳은 부산대학교이다. 이곳은 과거 1979년 독재정권을 타도하고자 부산지역 내에 있는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민주투쟁을 시작한 곳이다. 그래서 인지 제1 도서관 앞뜰에 민주열사를 기억하고자 한분 한분의 추모비와 민주의 불꽃을 형상한 조형물, 꺼지지 않는 민주주의의 염원하는 시가 있었다. 그 중에 조형물이 인상이 깊어 유심히 보니 자유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염원하는 영령들의 몸동작이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이었다. 또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푸른 하늘로 올라간 민주열사들을 영혼을 달래고 기억하고자 세워진 각기 다른 추모비의 민주열사들의 소중한 이름들을 보고 다시 한 번 가슴속 깊이 되새기며 팀원들과 기념관으로 향했다.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신나는 노래와 민주로드의 열정으로 더위를 달랬다. 기념관을 들어선 우리들은 제대로 운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아 많이 실망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동하였다.






◀ 부산민주공원 안에 있는 ‘민주의 불꽃’

 두 번째로 이동한 곳은 부산민주공원이다. 이곳은 민주항쟁기념관과 부산시민들이 다양한 문화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복합문화시설이기도 하다. 민주항쟁기념관 실내와 실외에는 민주주의의 역사적 사실을 알리려는 전시물들이 많이 있어 부산시민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이 부산으로 여행 온다면 꼭 한 번 들렸다가 가보면 가슴속 깊이 간직하게 될 추억이 될 수 있다. 이곳은 실내에 ‘늘 펼쳐 보임방’이라는 ‘민주홍보관’이 있어 누구에게나 쉽게 민주화운동에 대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우리 팀원들도 부산 내에 있는 민주화운동에 관련된 기념관을 잘 모르고 있었지만 조금이나마 민주주의의 발자취를 알아 갈 수 있었다. 그밖에 실외에는 민주항쟁에 숨져간 열사들을 기르는 탑 앞에서 팀원들과 묵렴을 하고 숙연하게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또한 거기에서 근무하시는 해설사분과 동행하면서 민주공원에 있는 사적지인 ‘민주의 불꽃’과 그 앞에 웅장하게 솟은 ‘충혼탑’이 우리의 눈동자 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 맛집투어 - 부산의 깡통(야)시장 )




 

▲ 부산 중구 신창동 ‘대각사’ 앞 - ‘박종철고무치사사건 추모대회’

세 번째로 이동한 곳은 대각사이다. 우리는 민주공원을 힘들게 올라가 열심히 민주공부를 해서인지 배가 너무 고팠다. 그래서 팀원들과 의논해서 부산 신창동으로 향했다. 원래는 계획된 경로이지만 우리 팀원들은 서로의 걱정과 배려로 1일차를 마무리 할 겸 다함께 배고픔을 달래고 민주로드를 하자고 이야기했다. (원산면옥 물냉 비냉) 하지만 ‘속전속결’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들은 대각사에서 발생한 ‘김종철 고문치사사건’에 관한 추모대회를 생각하면 법당 앞에서 팀원들과 두 손을 맞잡고 사진을 찍었다. 이것으로 1일차 민주역사지역은 마치고 오늘하루 더위로 고생한 팀원들을 위해서 맛집을 검색하여 얼음장과 같은 시원한 냉면을 먹었다. 이렇게 1일차는 부산 내에 관련된 민주로의 산책을 하여 내가 살고 있는 부산을 색다른 부산으로 느꼈다는 것에 너무 기뻤고 팀원들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 전했다. 혼자였다면 이 뜻 깊은 활동을 못 했을 뿐더러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어떤 활동이나 행동은 나의 주변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고 힘이 되어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장이 되었다.      민주로드-민주로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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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차
1 일차에서 부산대와 남포동 민주주의의 역사를 탐험하는 여정을 걷고 다음 날 부산 서대신역에서 팀원이 전체 모여 마산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자동차를 담당 한 저는 팀원들을 전부 태우고 사상부터 하단을 거쳐 서부산IC로 간 다음 창원에서 마산으로 넘어 갔습니다. 처음으로 팀원들을 데리고 간 곳은 3.15 민주기념공원 이었습니다. 위치는 경남 마산시 구암동에 위치해 있으며 진입하는 입구 주변 불법 주차 차량이 많아 접근에 어려움이 있고, 묘지 특성 상 산에 위치한 탓에 차가 없이 왔다면 꾀나 곤혹을 치렀을거 같았습니다.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3.15 민주묘지 였습니다.
당시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싸우다 희생된 유공자 영령분들이 자리하신 민주묘지는 훌륭하게 운영 되고 있었습니다. 김주열 열사의 묘를 방문 하고 기념관을 해설 하시는 분의 친절한 해설과 함께 둘러보니 더욱 알차게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무학초등학교 담벼락을 재구성 해 놓은 곳, 3.15 부정선거 당시 상황을 보여주었던 밀랍인형관, 김주열 열사의 시신 인양 과정부터 영원히 기억하자는 마지막 큐브도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방문 한 곳은 3.15 민주 기념탑을 갔습니다. 첫 번째로 방문 한 곳이 웅장했던 탓일까요. 두 번째 의거 기념탑의 장소와 안내 푯말 및 관리 상태가 보기 안 좋았습니다. 이 곳에서 시작 된 마산 민주 항쟁, 그 당시 넓게 펼쳐 나갔을 민주주의 외침이 느껴질 만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좀 더 관심 있게 이 곳이 관리 및 조성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마산 오동동 문화의 거리 뿐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산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기념탑 또한 , 마산 시 자체에서 관리를 했으면 합니다.
기념탑을 보고나니 팀원들과 저는 배가 고파 밥을 먹어야 겠어서 <민주로의 산책>팀의 맛집 임선생(임형우)님의 안내에 따라 `만날재 식당`을 가서 닭도리탕과 된장찌개를 각각 2인분 씩 먹었습니다. 사장님이 나이가 좀 있으신 어머님이셨는데 우리 팀이 들어올 때 배가 많이 고픈 티가 났는지 밥 두 공기를 꽉 꽉 채우셔서 공짜로 주셨습니다.


그렇게 배를 꽉 꽉 채우고 우리는 다시 차를 몰아 마산 중앙항 , CJ대한통운 옆에 위치한 김주열 열사의 시신 인양지를 방문 하였습니다. 진해 군 부대 근무 당시 자주 왔던 마산항 앞바다는 그 당시 바다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관리 되지 않은채 해양 쓰레기들로 둥둥 떠다니는 바다는 이런 바다에 열사가 가라앉았던 사실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열사의 굳은 의지 덕인지 27일 만에 떠오르셨어도 그 시신은 훼손치 아니하였으니 이 또한 민주주의 위대한 발걸음이었습니다.


인양지 다음으로 향한 곳은 기념탑 바로 옆이 었던 무학초등학교였습니다. 이 곳은 원래 계획 된 방문지는 아니였지만 기념관에서 보고 난 후 실재 하는 곳을 가보고 싶어 마지막에 추가 된 장소입니다. 이 벽에는 그 당시에 경찰이 사람의 머리와 가슴을 향해 발포 한 총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었습니다. 사진을 찍을 당시 자유 포즈로 하다 보니 더위에 지친 팀원들의 상태가 고스란히 나왔습니다. 그래도 마음만큼은 그당시 민주주의를 위해 활동 했던 시민 분들의 마음을 그대로 이어 받았습니다.





그 다음 행선지는 운전자 였던 제가 조금 겁먹었던 진도 팽목항, 현 진도항 이었습니다. 마산 무학초등학교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가장 빠른 길은 297km. 약 100km의 시속으로 달려도 3시간은 족히 걸리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세월호 침몰 사건 당시 해군으로 근무했던 저는 그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과 순간을 떠올리며 악셀에 올린 제 발에 의지를 더하여 무사히 7시 40분 경 진도 팽목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진도 시골 길을 달리며
그 당시 단원고 학부모님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 길을 버스를 타고 달려 가시면서 어떤 생각이셨을까..
도착도 전에 가슴이 미어왔습니다

Remember 416

바다 위에 있는 거대 바지 위에 아직도 그들을 그리워하는 플랜카드와 사진들 그리고 조형물들 모두..

민주의 길로 시작하여 추모의 길로 끝난 하루 였습니다..


오늘의 한마디

인생은 파도와 같다 <영화 관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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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로의 산책 3일차, 광주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우리는 2일차, 부산-마산-진도-광주의 빠듯한 계획을 수행하고, 3일 광주 현대웰빙파크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오늘의 민주로드 테마는 광주오월길 중 민중의길에서 “오월여성코스”였다.



본격적인 민주로드를 시작하기 앞서, 우리는 배고픈 몸을 달래기 위해 <오월여성코스>의 방문지 중 <양동시장>으로 발을 옮겼다.



우리는 그곳에서 맛집이라 소문난 <영창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던 중, 사장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옷을 보고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사장님은 36년 전, 40살의 나이에 이 양통시장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신 분들 중 한 분 이셨다. 그 당시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주셨던 사장님 덕분에 우리는 5.18민주운동이 한창이던 그때의 양동시장에 와있는 것 같았다. 사장님의 말씀 속에 묻어나는 그때의 안타까움과 속상함. 그 뒤섞인 감정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전쟁보다 더 심한 전쟁이었지. 끔직한 날들의 연속이었지. 여러분은 그런 일 안 겪었으면 좋겠네. 그때는 그렇게 많은 이가 피 흘리고 죽어갔지만, 여러분 때는 이런 끔직한 일.. 안 겪었으면 좋겠어. 부탁이네”



마지막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 그때, 사장님의 말씀. 우리는 양동시장의 영창식당 사장님의 말씀을 가슴 속에 품고, 본격적인 3일차 일정을 시작했다.







양동시장을 시작으로, 우리는 <구 광주적십자병원>, <오월어머니집>을 방문했다. 구 광주적십자병원은 출입이 금지되어있었고, 많이 쓸쓸해보였다. 오월어머니집은 광주 양림동 근대역사문화마을에 위치해있었고, 일요일이라 건물 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깔끔한 건물외관이 2010년 2월에 새로 개관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 했다.



우리는 다음 일정을 위해 발길을 옮기던 중, 어쩌다 방문하게 된 <광주 양림동 펭귄마을>에서 짧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짧은 여행 후, 우리는 <녹두서점 옛터>로 갔다. 구 광주적십자병원과 달리 당시 광주 유일의 여성단체인 송백회를 중심으로 여성활동이 이루어졌던 녹두서점의 옛터는 그 형체가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는 오일팔 당시 시위 대열이 형성되었던 <금남로>로 향했다. <오월여성코스>의 지도상의 금남로의 주소를 따라가니 <광주광역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도착했다.

이곳 해설사분의 설명을 들으며 기록관을 둘러보니, 우리가 앞전에 갔던 곳(부산, 마산, 광주일터)에 대해 더 깊이 알 수 있었다. 그냥 방문에 그곳을 바라볼 때는 ‘아, 그랬구나.’였는데, 기록관에서 해설을 들으며 다시 그 장소를 보게 되니, 마음이 울컥했다.









우리는 또 다시 뜨거운 햇살 아래 힘든 걸음을 이어갔다. 당시 광주의 상황을 외면했던 <광주MBC 옛터>를 밞고, 녹두서점 다음 당시 여성들의 조직 활동지였던 <광주YWCA 옛터>를 찾았다. 모두 녹두서점 옛터처럼 그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사적 표시가 없었더라면... 그저 사라진 역사에 불과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또 다시 발길을 돌렸다. 도착한 곳은 <5·18민주광장>이었다. 5·18민주광장에는 임시 희생자주검안치소였던 <구 상무관>과 5·18민주화운동의 본부가 있던 곳이자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 수많은 시민군이 목숨을 잃은 <구 전남도청>이 있었다. 햇빛을 받아 찬란한 이곳이 그 당시의 끔직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리고 저 시계탑에서 오후 5시 18분마다 흘러나온다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꼭 들으러 다음에 오겠노라 약속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여성 100여 명과 학생, 시민군이 구류되었던 <광산유치장 옛터>는 이미 역사 속에 사라져 아파트 단지가 되었고 관리인분도 이곳이 광산유치장 옛터라는 것을 잘 모르고 계셨다. 그리고 국가폭력으로 여성들과 시민군들이 상처받았던 <상무대 옛터>는 그 사적이 이전되어 행방을 찾을 수 없었고, 관련 비석은 쓰레기더미에 묻혀있었으며, 도로 중앙에는 사적 일부분만 남겨져 있었다.

역사를 잊지 않겠노라 해서 만들어둔 것들이, 이렇게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 보니, 허무했다. 특히 상무대 옛터에 관련해서는,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 모습을 보니 우리의 역사마저도 외면당하고 방치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 이것이 현실인 것을 이제야 제대로 느꼈는지... 많이 속상했다. 다른 사적지와 같이 이곳들도 많은 관심이 가져지길 싶었다.



민주로의 산책 3일차,

우리는 대략 4~5시간을 예상했던 코스를 8시간째 뜨거운 햇빛에 맞서 돌아다녔다.

모두 많이 지쳐했다. 그리고 상무대 옛터를 방문한 후 우리는 많이 허무해 했고, 의욕이 많이 사라졌었다.

시간은 오후 9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다들 더위에 지쳐 몸도 마음도 야위었었다.

그래서 끝내 마지막 장소, 맨몸으로 누워 저항하는 ‘죽음의 행진’을 했던 <농성광장 격전지>을 뒤로 한 채 우리는 3일차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못 간 마지막 장소가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다녀와 볼걸... 힘내 볼걸...

3일차 마지막 일정만큼은 후회되는 <민주로의 산책>이었다.

하지만 <농성광장 격전지>와 <금남로 시계탑>이 있기에, 광주는 또 다시 가고픈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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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 일요일 3일차

민주로의 산책 4일차

 

여행의 마지막 날은 광복절이었다. 넉넉히 잠을 청하고 일어나 새로운 산책을 시작했다. 우리의 넷째 날 코스는 오월 인권길의 영혼코스였다. 이 코스는 오월영혼이 잠들어 있는 5.18묘역으로 가는 길을 뜻한다. 코스의 첫 방문지는 5.18민주화운동의 최초 발원지인 전남대학교였다. 이번 여행을 하며 부산에서 부산대, 마산으로 가는 길에 창원대, 그리고 이 날 전남대학교를 가게 되면서 이번 여행은 각 지역의 거점대학교를 둘러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전남대학교는 민주화운동의 시발점답게 곳곳에 역사의 흔적을 기억하는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있는 민주화운동 사적 제1호가 전남대의 상징성을 여실히 보여줬다. 현재 대학교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불과 삼십여 년 전에는 곳곳에서 발생했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학업과 미래,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았다. 그분들에게 있어 자유와 평등의 기치는 그만큼 컸던 것 같다.











사실 여행을 하는 도중에는 사진을 찍고 예정된 코스를 둘러보기 빠듯해 그 의미하나하나에 많은 생각들을 하지 못하였다. 여행이 끝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왜 그렇게 까지 시위를 한 것인지에 대한 답이 선뜻 나오지는 않았다. 일단 민주주의에 대한 개인의 열망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만큼 클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회의적이었다. 5.18의 시작은 대학생이었다. 그들은 79년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꿨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억압받지 않고 자유와 평등을 얻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이 책으로 보고 들은 여러 민주주의 나라처럼 대통령을 스스로 뽑고 정치에 대해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고 관철시키길 희망했을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에 봄이 온다고 여겼지만 그 꿈은 신군부에 의해 깨져버렸다. 다시 군사독재의 그늘이 나라를 덮고 있었다. 잘못된 세상에 소리치는 것이 젊은이의 의무라고 누군가가 말했던가. 그들은 그렇게 거리로 나섰다.



전남대 안쪽으로 들어가니 그 당시 학생들을 이끌었던 분을 기리는 조각상과 기념비가 있었다. 고뇌하는 모습이 나타나있는데 그 당시 학교를 둘러싸고 있던 계엄군에 대항해 어떻게 시위를 이어나갈 것인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다. 굉장히 답답했을 것이다. 학생들이 운동을 통해 나라를 바꾸기엔 계엄군과 정부는 너무나 강경하고 강력했다.



광주를 다녀오고 많은 5.18관련 사료들을 보았지만 당시 상황과 당사자들의 입장이 명확히 그려지지 않아 이 사건을 다룬 영화인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 많은 정보를 얻은 상태에서 영화를 보니 대부분의 장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전남도청당시 첫 발포부터 수레에 놓인 시신, 희생당한 아빠의 사진을 안고 있는 아이의 모습까지.



영화를 보고 나니 든 생각은 그 당시 광주시민들은 민주주의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위해 싸웠다는 것을 느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나 당시 시민들은 공포와 분노에 휩싸였을 것이다. 시작은 대학생들의 민주주의를 위한 외침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진압하기 위한 계엄군의 몽둥이는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일반 시민들에게 까지 피해를 입혔다.

일반 시민들은 왜 시위에 가담하지 않았을까 고민해봤다. 대학생이 아닌 다른 계층의 사람들은 각자의 생업이 있었다. 고등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어른들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봤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당장 돌봐야하는 것은 개인의 삶이였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 까지 계엄군은 개입했다. 광주시민들은 자신도 다치지 않을까, 우리 가족과 친구가 다치지 않을까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분노했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그들의 외침은 틀리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시위는 대학생에서 일반 시민들까지 확대되었다. 만약 시위가 이렇게 까지 커지지 않았더라면 이정도로 많은 희생자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신군부는 더 강하게 광주시민들을 진압했고 그렇게 민주화운동은 진행됐다. 여행하는 도중 만난 그 당시를 경험한 어머니 한분은 대화도중 전쟁이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하셨다. 5.18은 전쟁이었다.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시립무등도서관이었다. 무등도서관은 5.18이후 현대의 고 정주영회장이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도서관을 세우고 광주에 기증했다고 한다. 5.18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뜨거웠던 민주화운동이었다. 책을 읽고 배움을 쌓는 도서관을 지음으로써 민주주의의 가치가 발전하고 시민의식이 더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광복절 공휴일이라 내부를 구경할 수 없었고 앞쪽에서 사진만 찍고 발걸음을 옮겼다.



세 번째로 찾은 곳은 광주교도소 옛터였다. 오월코스에는 현재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고 사적만이 그 자리를 지키는 옛터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곳은 인터넷이나 내비게이션에 검색을 해도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다. 시민들에게 여쭤보아도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알고 있는 분들이 거의 없었다. 광주교도소 역시 그랬는데 같은 장소를 두 번이나 돈 뒤 길을 잃고 방황하던 도중 기범이가 길가에 있는 사적을 발견하였다. 이런 옛터의 사적을 찾는 일은 마치 런닝맨의 미션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유재석이 된 것처럼 뛰어다니며 시민들에게 물어물어 사적을 찾던 모습이 생각난다.



광주교도소는 죄 없는 많은 광주시민들이 끌려와 고문을 당한 곳이다. 특히 광주에서 외곽으로 나가는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끌고 오기도 했다. 당시 광주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광주로 들어오는 것도 광주로 나가는 것도 저지되었다. 광주 시민들은 다른 지역으로부터 식량도 사람도 지원받지 못했다. 광주시민들은 서로서로 도왔다. 식량을 나누고 서로 의지했다. 5.18 당시 가게가 털리거나 물건의 훔침이 없었던 점은 정말 놀랍고 대단한 일이다.



이후 찾은 곳은 남월동 구묘지이다. 처음 입구로 들어갔을 때 눈앞에 나타난 광경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정돈 되지 않은 묘지들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희생자들이 있고 그 묘지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방치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많은 묘지는 모두 5.18의 희생자가 아니었고 몇몇 묘지만이 가묘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곳엔 5.18정신계승 민족민주열사 유영봉안소가 있었다. 안쪽엔 희생자들의 사진과 인적사항이 기록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희생자분들은 나보다 어렸다. 그 나이에 죽기엔 너무 젊고 희망차 보였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씁쓸하다.



벌써 여행의 마지막코스인 국립5.18민주묘지에 다다랐다. 5월 18일이 되면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념행사를 하는 곳. 이번 해에는 기념곡 하나 때문에 꽤나 소란스러웠던 그 곳.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고 와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곳이다. 일단 굉장히 넓었다. 민주의 문과 대형 태극기가 우리를 맞아주었고 웅장한 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념사진을 찍은 후 추모관에 들어갔다.



광복절 휴일을 맞아 국립묘지를 찾은 시민들이 있었다. 가족 단위의 분들이 많았으며 외국인 관광객도 있었다. 휴일에 5.18의 의미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아 뿌듯했다. 추모관은 5.18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해놓았다. 날짜별로 정리가 되어있었고 추모하는 시와 조형물들이 5.18의 의미를 더했다. 2층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눈물을 상징하여 연못을 이루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은 계엄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들이 꿈꾸었던 민주화가 이뤄지기 까지 7년이 걸렸다. 무수히 많은 희생자가 있었지만 그 희생을 만든 장본인들에 대한 처벌이 적합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추모관을 나서자 갑작스럽게 비가 내렸다. 무더위를 해소해주는 반가운 비였다. 국립묘지를 구석구석 살펴보지 못했지만 다음에 또 올 것을 기대하며 남겨두기로 했다. 여행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모든 일정을 무사히 소화해냈다는 기쁨과 많은 이야기들을 가슴에 담은 체 부산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8.15에서 5.18을 본 마지막 산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