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운동과 서울 



수도 서울에는 청와대, 국회 의사당, 대법원, 정부서울청사, 헌법재판소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서울은 정치 변화에 민감하고, 국민들이 정치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곳입니다. 실제로 서울은 민주화 운동의 여러 국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4·19 혁명은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부터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월 15일 마산에서 불붙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자유당 독재, 3·15 부정 선거에 대한 반발이 시위로 들끓었습니다. 서울에서는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혁명의 횃불을 들었습니다. 뒤이어 대광고, 동성고 등 학생들과 시민들이 시위에 적극 나섰습니다.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4월 19일, 국회 의사당(서울특별시의회 본관 자리)과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는 시위대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4월 25일, 대학 교수단은 서울대(마로니에 공원 자리)에 모여 성명을 발표한 뒤 거리로 나섰습니다.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날 탑골공원에서는 사람들이 이승만 동상 목에 철사 줄을 걸어 동상을 쓰러뜨렸습니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 정변으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다시 어둠에 휩싸였습니다. 박정희는 1972년에 10월 유신을 일으켜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철저히 억압했습니다. 이 시절 남산의 중앙정보부(훗날 국가안전기획부)와 수도방위사령부는 철통같이 박정희의 독재 권력을 지켰습니다. 

 

한편 경제 발전을 급속도로 추진하는 가운데 청계천 평화시장 등에서는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온몸을 불살라야 했던 것은 기계처럼 취급받는, 도저히 희망을 꿈꿀 수 없는 노동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피살되어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습니다. 20년에 가까운 독재의 종말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11월, 서울YWCA에서는 재야인사들이 결혼식으로 위장해 대회를 열고 유신 헌법 폐지, 조기 총선 등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1979년 12월 12일, 혼란한 틈을 타 전두환·노태우 등이 군대를 움직여 권력을 잡았습니다. 국민들의 거센 반발이 이어져 1980년 5월, 서울역 광장은 시위 행렬로 가득 찼습니다. 광주에서도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렇게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85년 대학생들은 미 문화원(그레뱅 뮤지엄 자리)을 점거하고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었습니다. 



감시와 탄압이 계속되는 가운데에도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움직임은 계속되었습니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다시 한 번 민주화 운동의 열기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해 5월 향린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발기인 대회가 열린 데 이어, 성공회성당에서 6·10 국민대회가 열렸습니다. 경찰에 쫓기던 시위대는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농성을 계속했습니다. 이렇게 전개된 6월 민주 항쟁은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 후로도 민주화 운동,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광화문 앞에서는 2002년 미군 장갑차에 깔려 목숨을 잃은 여중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기 위해, 그리고 2008년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 촛불을 들었습니다. 



해방 후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서울도 많이 변화했습니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잊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서울의 민주화 운동 유적지들을 돌아보면서, 4·19 혁명부터 시작된 민주화 운동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