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대)고 오원택 열사 추모비

오원택(경기대학교 재학 중 군 입대, 1995년 3월 17일 사망)오원택 동지는 92년 경기대학교 관광경영학과에 입학하여 모범적이고 헌신적인 학교생활을 하였다. 2학년때는 혼자서 6개의 학생회 각 단위 부서 연석회의를 참가하고 매일 학생회실에서 살다시피하면서 학우와 함께 조국을 생각하는 청년이었다. 

그러다 공대 이전 운운하면서 폐쇄하려던 사학비리 주범 손종국과 모리배로 대변되는 재단에서 사주한 유도부의 야구방망이에 맞아 심한 후유증을 호소하다 95년초 입대한 후 운명하였는데 부대측의 발표는 부대내의 베란다에서 추락하여 숨졌다고하나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동지를 생각하며>

49년 10월 20일 수요일 (1994년이지만 그는 분단 49년 해방 49년이라는 의미로 년력을 “자주민주통일 진군 49”라 사용했다.)

올해도 저물어가고 가을도 다 지쳐가고 낯짝은 인자 살아나고 내 心身들도 살아나고, 나의 쉼터도 살아나고.

외로운 病室이었다. 만 20일동안 가끔 다가와 주는 동지들이 있었기에 살아날 수 있었지만 병실을 뛰쳐나와 돌아온 校庭. 그리고 두달만에 돌아간 故鄕. 반가운 사람들. 그래도 다쳤다고 병원에 자빠져 있었다고 사람대접 해주더만.

..... 중 략 .....

오늘은 서울·수원대 연대 집회 있는 날. 곧 출발해야 헌디 사람들 꼴이 별로 안뵌다. 오늘 투쟁 일궈내서 내일은 꼭 국회접수 해얀디. 경기 학원 문제해결의 의지를 극명해얀디. 기나긴 올해 학원 자주화 투쟁의 마무리를 야물게 해얄것인디. 그리고 올해 승리를 발판으로 민족사학 건설에 박차를 가해얀디. 지금 출발헌단다.

더 써야 씨것는디. 어찌것냐. 大義를 위함인디. 우리의 京畿를, 祖國을 위해선디.


<유고글> 

낙서장에

그래도 내가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이땅에 미제의 그림자가 걷혀지지 않았기에 미제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이 내 어깨에 지워져 있기에 학우 대중들이 존재하기에 나와 함께 투쟁의 한길로 가야할 학우들이 있기에 이러한 이유들이 있기에 식민지 조국의 암울한 현실속에서도 내 삶을 구가하고 잘 살아 나가려고 몸부림치고 학우대중을 만나 이야기하며 술을 구가한다.

<추모비에 쓰인 내용 - 1994년 5월 22일 날적이 중에서>


학원 자주의 불꽃  - 고 오원택 열사 추모비


<전면> 고 오원택 학우는 전남 장성에서 출생하여 92년 민족경기 관광경영학과에 입학, 헌신적인 학교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93년 9월 21일 서울교사 학우들이 수원으로 총장 면담투쟁을 전개하던 중 손종국이 사주한 유도부의 야구방망이에 맞아 지병이 악화되어 고통을 호소하다가 95년 초 입대. 결국 95년 3월 16일 운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이러한 고 오원택 학우의 모범적인 삶을 기리고자 그를 기억하는 많은 분들과 함께 추모비를 세웁니다. 오원택 열사의 불꽃은 아직도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있습니다.

오원택열사추모사업회, 12대 총학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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