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장

1945년 10월 이승만 귀국. 귀국 후 처음 1년 6개월 동안 기거했던 곳은 돈암장이고, 다시 마포장을 거쳐 옮긴 곳이 이곳 이화장이었다. 당시 실업가 권영일 등 30여 명의 독지가가 나서서 이승만돕기 운동을 전개하여 모금해서 구입한 것이 이화장이다. 이화장 터는 일찍이 조선시대 신광한의 옛 집터로 일명 신대(伸臺)라 하였는데, 이화장 정문 앞에는 인평대군의 석양루가 있었다고 한다. 이화장 건물은 전통한옥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시대상을 수용하여 변모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4.19혁명으로 쫒겨난 이승만의 이화장에서 마지막 모습.

1947년 5월에서 8월까지 개회되었던 제2차 미소공위가 아무런 결정도 못내리고 폐회하자 그 해 가을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었고 한반도에서 총선거 실시와 독립정부 건립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은 사실상 백지로 돌아가고 신탁문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게 되었다. 1948년 초에 입국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한반도 총선 실시를 추진해 나갔다. 유엔은 소련이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반대하자 남한지역만의 단독선거를 결정하였다. 이때 한독당도 단독선거를 반대했지만 이승만과 한민당은 단독선거를 적극 지지했다. 이것이 성공하여 1948년 5.10총선이 실시되었다. 이때 이승만은 이화장에 지내면서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앞장서서 추진했다. 

이화장에는 조각당이 있다. 제헌의회에서 1948년 7월 20일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정부조직법에 의거해 이 곳에 조각 본부를 두고 국무총리와 12부 장관을 선정했으니 이곳은 정부 수립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5.10선거 때 단일정당으로 최대 의석을 얻은 곳은 한민당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한민당 당수 김성수를 이화장으로 불러 한민당의 내각책임제를 거절했다. 결국 1948년 7월 17일 반포된 헌법은 대통령중심제를 골격으로 삼았다. 12부 장관 선정에서도 한민당은 반 정도를 예상했지만 김도연 한 명만 입각했다. 두 번 배신당한 한민당과 그 후신 민주국민당은 이승만 집권 기간 동안 야당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승만은 초대 내각 농림부 장관에 좌파인 조봉암을 임명해 세인의 의표를 찌른 인사를 했다. 조봉암이 추진한 농지개혁은 이승만 정부의 업적 중 하나인데, 한민당의 기반인 지주세력의 약화를 가져오는 효과를 거두었다. 

1960.4.26 오전9시 송요찬 계엄군사령관은 50분간 이 대통령을 방문해서 사태 설명과 수습책을 제안했고, 일반인3명, 대학생1명, 고고생 1명으로 구성된 시위단 대표 5명과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했다. 오전 10시20분 이 대통령은 계엄사령부로 하여금 하야성명을 발표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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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하야성명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 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애족 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국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