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부통령 가옥

1937년에 장면 당시 부통령이 건설한 이 가옥은 한식, 양식, 서양식 건축양식이 모두 혼합되어 있는 보기 드문 건물이기도 하다. 현재 등록문화재 35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안채, 사랑채, 경호원실, 수행원실이 모두 잘 보존되어 있다. 안에 있는 집기와 가구들은 유족들이 기증한 물품들이다.


4.19혁명 인물 열전

장면(張勉)

1899년 8월 28일 인천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운석(雲石)이다.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를 졸업하고, 1919년 YMCA영어학교를 나와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5년 맨해튼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로마에서 열린 ‘한국 79위 순교복자 시복식‘에 참석한 다음 귀국하였다. 가톨릭교 평양교구(平壤敎區)에서 활약하다가, 동성고등학교의 전신인 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 교장에 취임, 8·15광복 때까지 근무하였다. 이 학교는 1960년 419 혁명에 앞장 선 학교이기도 하다. 1946년 정계에 투신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원·과도정부 입법의원 등을 역임하고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 수석대표로 참석, 한국의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이어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敎皇廳)을 방문한 후 미국에 가서 맨해튼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駐美大使)가 되어 미군의 참전을 이끌어내는 데 공헌하였다. 당시 그의 카톨릭 인맥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950년 영국 포덤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6·25전쟁 때는 주미대사로 있으면서 유엔과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퇴하였다.

그 후 야당의 지도자로서 자유당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으며, 1955년 신익희(申翼熙) 등과 민주당(民主黨)을 조직, 최고위원이 되고 1956년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기 부통령 공관은 서소문 쪽 순화동에 있었다고 한다. 순그 해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을 당하였으나 경상(輕傷)에 그쳤다. 1957년 미국 시튼 홀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9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당선되었으며, 1960년 조병옥(趙炳玉)과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다가 부정선거로 인해 낙선하였다.

4·19혁명 후 제5대 민의원(民議員)을 거쳐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집권 후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는 정책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게 되어 19615·16군사정변으로 총리 취임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516일 당시, 그가 수녀원으로 피신한 일화는 유명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세례 대부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 후 정치정화법(政治淨化法)에 묶여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한때 이주당(二主黨)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석방된 후 종교생활에 전념하다가 간염으로 죽기 직전 정치정화법에서 풀려났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포천(抱川) 가톨릭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 네이버 백과 사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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