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동상과 다리


전태일 열사 약력
(평화시장 노동자, 1970년 11월 13일 분신)
◦ 1948년 8월 26일  경상북도 대구시 남산동 출생
◦ 1963년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입학 후 가장 사정으로 그만둠 
◦ 1965년               가을 평화시장 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한 후 재단보조, 재단사로 일함
◦ 1969년 6월         평화시장 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 조직
◦ 1970년 4-8월      서울 삼각산의 ‘임마뉴엘 수도원‘ 건물 신축 공사장에서 잡역부로 일함
◦ 1970년 9월         바보회를 투쟁단체인 ‘삼동친목회‘로 새롭게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
◦ 1970년 10월 8일  삼동회 대표들이 (주)평화시장 사무실에 찾아가 다락방 철폐, 노조결성지원 등 8개 항의 요구를 제출
◦ 1970년 10월 24일 근로조건 개선 시위를 기도했으나 실패
◦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면서 분신. 밤 10시경 성모병원 영안실에서 사망
○ 1970년 11월 13일, 스물 두 살의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절규하며 한줌 불꽃으로 산화해 갔다. 그의 손에는 노동자에게 아무 쓸모도 없었던 근로기준법을 화형시킨다는 의미로 근로기준법 책자가 들려 있었고, 이 꽃다운 청년노동자의 분신투쟁은 이후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와 노동해방을 갈망하는 민중들의 투쟁으로 되살아나곤 하였다.

1) 전태일의 어린 시절과 바보회
○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중퇴가 그의 학력의 전부였고, 어려서부터 무허가 판자촌에 살면서 껌팔이, 신문팔이, 솔과 조리장사, 구두닦이, 리어카 뒤밀이 등의 일을 하며 밑바닥 인생을 살다가 1966년, 그의 나이 17세에 평화시장 뒷골목 미싱사로 취직했다가 다시 ‘한미사‘라는 점퍼 집의 재단보조가 되었다. 1967년 2월 24일 그는 마침내 바라던 재단사가 되었지만 하루 15시간의 중노동 속에서 폐병으로 각혈한 미싱사 처녀 노동자가 해고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 때부터 그는 투쟁하는 노동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1969년 말경, 동료 재단사들을 설득하여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근로기준법을 지키게 하기 위해 ‘바보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 바보회 활동을 의욕적으로 전개해 조직확장에 열을 올리자, 전태일이라는 이름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업주들은 ‘위험분자‘로 그를 낙인찍어 해고하였다. 1969년 9월, 전태일은 ‘노동실태 조사용 설문지‘를 인쇄하여 바보회 회원을 통해 설문조사를 하고 이를 근거로 근로기준법상 감독권 행사를 요구하기 위해 시청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갔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실망한 그는 좌절과 번민 속에서 모범업체 설립을 꿈꾸기도 했지만, 바보회는 거의 와해상태에 빠졌다. 1970년 4월 전태일은 삼각산 임마뉴엘 기도원 신축공사장에서 근로기준법을 다시 연구하고 동시에 좌절한 노동운동을 재정비하기 위한 계획에 몰두하여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2) 전태일의 노동운동
○ 1979년 9월 새로운 각오로 평화시장에 돌아온 전태일 열사는 바보회를 재정비하여 ‘삼동친목회‘로 조직을 일신하고 그 첫 사업으로 평화시장 일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재조사해 10월 6일, 노동청장 앞으로 ‘평화시장 피복제품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 진정서에는 ‘삼동친목회 회원 일동‘의 명의로 대표에 전태일, 서기 이민섭, 정회원 신진철, 최종인, 김영문, 조명섭, 강진환, 주현민 외 93명의 서명이 첨부되었다. 이 진정서는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켜, 10월 7일 각 석간신문에 일제히 보도기사가 실렸고, 특히 경향신문은 사회면 톱기사로 이 내용을 보도하였다.
○ 그러나 요구조건은 차일피일 미루어졌고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삼동회 회원들은 10월 20일 노동청 국정감사 기간에 노동청 앞에서 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웠으나,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는 근로감독관의 이야기에 기만당해 계획을 취소하고 말았다. 그러나 국정감사가 지나자 저들은 ‘할 대로 해봐라!‘는 태도였고, 이에 분노한 삼동 회원들이 10월 24일 오후 1시 평화시장 국민은행 앞길에서 시위를 계획했으나 삼엄한 경비로 실패하였다. 다시 11월 7일까지 문제를 해결하겠다던 약속이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자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결의하고, 구호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주일에 한번만이라도 햇빛을!‘, ‘하루 16시간 노동이 웬 말이냐?‘ 등으로 결정하고,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화형 시키자는 연설을 하기로 하였다.

3) 불꽃! 전태일
○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삼엄한 경비와 경찰들의 몽둥이에 밀리면서도 5백여 명의 노동자들이 왔다 갔다 하였다. 10여분 후 한 되 가량의 석유를 온 몸에 끼얹고 불을 붙인 전태일 열사가 국민은행 앞길로 달려나왔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며 몇 마디의 구호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것은 지옥에서도 볼 수 없는 참혹한 풍경이었다. 그를 낳고 22년 동안 기른 어머니라 할지라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몰골로 마지막 남은 생명의 힘을 다 짜내어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쳤다. 구급차가 달려오고 그는 친구 두 명과 함께 인근에 있는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졌다. 이 때가 오후 2시경이었다.
 
○ 2시 30분 경, 소식을 듣고 수십 명의 노동자가 달려왔다. 그들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최종인을 비롯한 몇몇 삼동회원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긴급 출동한 기동경찰과 혈투를 벌이며 동대문 쪽으로 밀려갔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경찰의 곤봉에 머리가 으깨어지고 구둣발에 짓밟혀 개처럼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 한편 병원으로 옮겨진 전태일 열사는 운명하는 밤 10시까지 8시간 동안 화기를 가시게 하는 1만 5천원짜리 주사 두 대도 맞지 못하고, 병원과 근로감독관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는 그를 사랑한 어머니와 그의 동료들에게 투쟁을 계속해 줄 것을 당부했다. 저녁이 되면서부터 열사는 기력이 탈진해 가는 듯 잠잠하게 누워 있었다.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듯 하더니 눈을 떠서 힘없이 “배고프다”고 하였다. 12일 아침 집에서 라면 한 그릇을 먹고 나간 후 이틀 동안 아무 것도 안 먹고 굶었던 그였다. 그리고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꽃다운 스물 두 해의 고통 속에서도 끝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고 퍼주려 했던 한 가난한 청년노동자 전태일은 따뜻한 자신의 마음으로 자신을 태우고, 남김없이 모든 것을 남은 사람들에게 던져주며 산화해 간 것이다.

4) 전태일의 유산, 청계피복 노조
○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간 전태일 열사의 뜻을 새겨 이소선 어머니는 “내 아들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며 아들의 시신 인수를 거부하고, ① 주일휴가(유급휴일)제 실시, ② 법으로 임금인상(월급공), ③ 8시간 노동제 실시(초과근로수당제), ④ 정규임금 인상, ⑤ 정기적인 건강진단 실시, ⑥ 여성생리 휴가, ⑦ 이중 다락방 철폐, ⑧ 노조결성 지원 등의 8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 [70.11.18]전태일열사 장례식 -
                   (사이버경찰청 사진인용)
 
○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8시간 노동제와 노조결성 지원의 요구조건을 빼고 나머지는 다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요지부동이었다. “나중에 나 혼자 내 아들 시체를 토막내 치마에 싸서 묻는 한이 있더라도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은 상태에서 절대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며 완강하게 투쟁을 계속했다. 마침내 11월 16일 이승택 노동청장이 전태일 열사 빈소에 8개의 요구조건을 무조건 수락할 것을 공약했고, 11월 18일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약속이행을 요구하는 이소선 어머니와 최종인 노조결성 준비위원장을 비롯한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중앙청과 국회의사당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한 후 11월 27일 가입조합원 560명을 대표하는 56명의 대의원으로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의 결성대회를 치렀다. 12월 10일 노조결성 신고 필증을 받아 청계피복노조는 1970년대 노동운동의 전진기지로서 마침내 뿌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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