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가톨릭센터

자료 : 87년 6월항쟁당시 카톨릭센터앞 

1987년 6월 17일 부산시내 10개 대학생 7천여명 각각 교내서 출정식 거행하면서 가두시위가 진행되었다. 500여명이 카톨릭센터 안에 남아 농성하기로 결정, 그 후 350여명이 7일간 “군사독재 타도”, “양심수 석방”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전투경찰에 의해 고립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장기농성은 부산지역 전역에 있어서의 항쟁의 상징적 중심지로 작용하였으며, 부산의 ‘명동성당’이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끈질긴 투쟁의 장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자료 : 91년 5월 카톨릭센터앞 


이후에도 카톨릭센터는 이러한 민주주의 투쟁의 산실로 기능하게 되었다. 1989년 공안탄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5월 10일 조선대 학생 이철규 군이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의문투성이인 이철규 군의 죽음에 대한 학생들의 문제 제기가 공안정국 속에서도 5월 뜨겁게 달구었다. 이런 가운데 부산·울산지역 7개 대학 67명은 이철규·이경현 사건진상 규명,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 축전 참가 보장 등을 요구하며 6월10일부터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가기도 했다.

<6월항쟁 표지석>  

가톡릭센터: 꺼져가던 6월항쟁의 불씨를 되살린 부산 6월항쟁의 상징적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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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 (소통과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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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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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09:00 -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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