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3.15묘지

시설물

건축물 5동 1,910㎡(578평) : 3·15기념관, 유영봉안소, 상징문, 휴게소, 안내소상징조형물 5종 : 민주의문, 조각군상, 부조벽, 기념시비, 시가있는 길조경 : 수목 41종, 26,102본, 잔디면적 15501㎡(4,689평) 편의시설 5종(95개소) :공중화장실, 파고라, 야외용벤치, 음수대, 안내판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과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과 불법이 범람했고, 온갖 기구와 대중조직들이 임의적으로 또한 일방적으로 동원되었다. 이를 규탄하고, 정권의 종식을 요구하는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서의 4ㆍ19혁명이 전개되기에 앞서 마산에서 3ㆍ15의거가 발생했다.
마산에서의 학생 및 시민들의 시위가 격화되자, 경찰은 발포를 하여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후 마산에서는 집회와 시위가 불규칙적으로 계속 일어났고, 그때마다 경찰은 경찰봉과 최루탄, 그리고 소방차 등을 앞세워 진압을 했다. 이런 시위가 다시 크게 폭발한 것은 4월 11일에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면서부터였다. 학생과 시민의 항거는 연일 계속되었고, 사망자와 피해자가 속출했다.
3ㆍ15의거는 넓은 의미의 4ㆍ19혁명 또는 4월혁명에 포괄되었으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독자성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94년 5월에 ‘3ㆍ15의거 성역화사업 추진이 결정’되었고, 1998년 3월부터 조성공사에 착수하여 2003년 3월에 완공되기에 이르렀다. 국립3ㆍ15민주묘지는 민주의 문, 3ㆍ15기념광장, 기념관, 참배단, 묘역, 유영봉안소, 기념시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역은 총4개로 분할되어 있다.

 
* 3ㆍ15 마산시위
1) 1948년의 정부수립 이래로 이승만 정부는 민족의 화해와 통일보다는 친미와 반공을 앞세우면서 반민족 친일행위에 대한 단죄를 목적으로 1948년 10월에 발족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였고, 미국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부패특권 세력에 부를 편중시킨 반민주주의 독재 정권으로,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종신집권을 꾀한 ‘사사오입개헌’을 자행하고 정적제거를 위해 ‘진보당사건’을 조작하여 조봉암 처형 및 언론자유를 정면에서 말살한 경향신문 폐간 등 끝없는 반민주주의적 폭거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을 갖고 1960년에 일어난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부정선거에 대한 반대와 규탄에서 시작하여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발전한다. 4·19혁명은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 2월 28일 대구학생시위에서부터 시작하여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일 당일의 3·15마산 시위, 그리고 4·18 고려대생 시위에 이어 절정에 이른 4월 19일의 대규모시위와 4·25 대학교수단 시위로 전개되었다.
2)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4대 정부통령 선거는 지방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곳곳에서 사전투표, 3인조 공개투표, 대리투표, 민주당 참관인 축출 등 많은 부정이 저질러졌다. 민주당은 투표가 진행 중인 4시 30분에 3・15정부통령선거가 전적으로 불법・무효라고 선언했다. 선거 결과 이승만 후보가 유효투표의 88.7%에 해당하는 9,633,376표, 이기붕 후보가 유효투표의 79%에 해당하는 8,337,059표, 장면 후보가 1,843,758표를 얻었다고 발표되었다. 1956년 부통령 선거에서 장 후보가 이 후보보다 20여만 표가 더 많았고, 그 뒤 자유당에 대한 민심이 더욱 악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기붕이 장면보다 4배 이상을 득표했다는 것은 이 선거가 얼마나 극심한 부정선거였는가를 이승만・자유당 간부・장관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게 했다.
거의 모든 선거구에서 유권자들이 중압감에 눌려 있었는데,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항구도시 마산에서 격렬한 시위와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사전투표, 3인조 공개투표 등 갖가지 부정투표에 민주당 마산시당은 오전 10시 30분에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마산시당 상급당인 경남도당은 오후 1시 30분에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마산에서 민주당원이 중심이 된 시위에 시민・학생들이 합세해 오후 7시 30분경에는 시위군중이 1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때부터 경찰이 총을 쏘았고, 흥분한 군중들은 여당계 신문사인 서울신문사, 자유당선거대책위원회 등이 입주한 건물과 파출소 등을 파괴했다. 이날 8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당했다.
제1차 마산시위 이후 여러 지역에서 데모가 있었지만, 제2차 마산시위가 없었다면 3・15선거 결과가 기정사실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경찰이 마산시위 배후에 공산당이 있는 것처럼 몰아가려는 것에 분노한 마산의 학생・시민들은 4월 11일 실종된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자 일제히 궐기했다. 이날 오후 6시경에는 시위자가 3만 명이나 되었다. 이 시위에는 수많은 어머니들이 가담해 “죽은 내 자식을 내놓아라”라고 소리 질렀다. 밤에 다시 경찰 총격으로 2명이 사망했다. 시위는 12, 13일에도 계속되었다. 이 대통령은 13일과 15일에 잇달아 특별담화를 발표해 마산폭동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를 씌우며 위협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주요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편,『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김정남 저, 『4·19혁명』
3·15의거기념사업회 편,『3·15의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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