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관련기사 :  `민주화 관련 첫 문화재` 김주열 시신인양지, 표지판 세워 [오마이뉴스 2011.11.14]


김주열 열사 약력

- 1944년 10월 7일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9번지에서 부친 김재계, 모친 권찬주 여사와의 슬하에서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출생

- 1956년 금지초등학교

- 1956년 금지중학교 졸업하고 남원농업고등학교(현 용성고등학교)에 진학하였으나 7월 3일 퇴학당함

- 1960년 서울고등학교에 원서를 냈으나 은행원이 되어 가계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로 마산 상업고등학교 진학을 결심. 당시 이승만 자유당정권의 부정 부패가 극한 상황에 달해 3.15부정 선거를 감행하였고 드디어 3.15마산 민중의 민주화 의거가 폭발 이시위에 선봉에 섰다. 마산시청 앞에서 순국하였으나 경찰은 시신을 숨겨 행방불명으로 처리

- 1960년 4월 11일 행방불명되었던 주검이 마산 중앙부두에 떠오름

시신의 오른쪽 눈에는 미국제 최루탄이 박힌채 주검에는 퍼렇게 이끼가 낀 상태였다. 경찰은 남해바다 멀리 수장하였으나 밀물을 타고 27일간을 흘러 마산앞 바다까지 찾아온 것이다. 허종 신문기자가 찍은 처참한 주검의 사진은 전국은 물론 전세계를 경악케 했으며 제2의 항쟁으로 불타올랐고 이 항쟁은 서울, 부산을 비롯 전국으로 확산 4.19혁명을 완성해 냈고 부패한 독재자 이승만은 4.26일 하야 성명을 내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

* 3ㆍ15 마산시위

1) 1948년의 정부수립 이래로 이승만 정부는 민족의 화해와 통일보다는 친미와 반공을 앞세우면서 반민족 친일행위에 대한 단죄를 목적으로 1948년 10월에 발족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였고, 미국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부패특권 세력에 부를 편중시킨 반민주주의 독재 정권으로,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종신집권을 꾀한 ‘사사오입개헌’을 자행하고 정적제거를 위해 ‘진보당사건’을 조작하여 조봉암 처형 및 언론자유를 정면에서 말살한 경향신문 폐간 등 끝없는 반민주주의적 폭거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을 갖고 1960년에 일어난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부정선거에 대한 반대와 규탄에서 시작하여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발전한다. 4·19혁명은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 2월 28일 대구학생시위에서부터 시작하여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일 당일의 3·15마산 시위, 그리고 4·18 고려대생 시위에 이어 절정에 이른 4월 19일의 대규모시위와 4·25 대학교수단 시위로 전개되었다.

2)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4대 정부통령 선거는 지방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곳곳에서 사전투표, 3인조 공개투표, 대리투표, 민주당 참관인 축출 등 많은 부정이 저질러졌다. 민주당은 투표가 진행 중인 4시 30분에 3・15정부통령선거가 전적으로 불법・무효라고 선언했다. 선거 결과 이승만 후보가 유효투표의 88.7%에 해당하는 9,633,376표, 이기붕 후보가 유효투표의 79%에 해당하는 8,337,059표, 장면 후보가 1,843,758표를 얻었다고 발표되었다. 1956년 부통령 선거에서 장 후보가 이 후보보다 20여만 표가 더 많았고, 그 뒤 자유당에 대한 민심이 더욱 악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기붕이 장면보다 4배 이상을 득표했다는 것은 이 선거가 얼마나 극심한 부정선거였는가를 이승만・자유당 간부・장관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게 했다.
거의 모든 선거구에서 유권자들이 중압감에 눌려 있었는데,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항구도시 마산에서 격렬한 시위와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사전투표, 3인조 공개투표 등 갖가지 부정투표에 민주당 마산시당은 오전 10시 30분에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마산시당 상급당인 경남도당은 오후 1시 30분에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마산에서 민주당원이 중심이 된 시위에 시민・학생들이 합세해 오후 7시 30분경에는 시위군중이 1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때부터 경찰이 총을 쏘았고, 흥분한 군중들은 여당계 신문사인 서울신문사, 자유당선거대책위원회 등이 입주한 건물과 파출소 등을 파괴했다. 이날 8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당했다.
제1차 마산시위 이후 여러 지역에서 데모가 있었지만, 제2차 마산시위가 없었다면 3・15선거 결과가 기정사실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경찰이 마산시위 배후에 공산당이 있는 것처럼 몰아가려는 것에 분노한 마산의 학생・시민들은 4월 11일 실종된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자 일제히 궐기했다. 이날 오후 6시경에는 시위자가 3만 명이나 되었다. 이 시위에는 수많은 어머니들이 가담해 “죽은 내 자식을 내놓아라”라고 소리 질렀다. 밤에 다시 경찰 총격으로 2명이 사망했다. 시위는 12, 13일에도 계속되었다. 이 대통령은 13일과 15일에 잇달아 특별담화를 발표해 마산폭동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를 씌우며 위협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주요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편,『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김정남 저, 『4·19혁명』
3·15의거기념사업회 편,『3·15의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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