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3.15기념탑


3·15의거 기념탑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은 장기집권을 꾀하기 위해 온갖 부정선거를 획책하자 이에 분개한 시민과 학생들이 항거해 싸웠다. 3월 15일 1차 의거, 4월 11일 2차의거에서 12명이 총격으로 사망하고 700여 명이 체포 구금되어 많은 고문을 당했다. 이는 곧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4월 26일 이승만 정권은 국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날 가장 치열했던 투쟁 현장에 이 탑을 세워 우리 마산 시민들의 기개와 3·15의거 정신을 기리고자 한다.

 
<전면>
저마다 뜨거운 가슴으로 민주의 깃발을 올리던 그 날 1960년 3월 15일! 더러는 독재의 총랑에 꽃이슬이 되고 더러는 불구의 몸이 되었으나 우리들은 다하여 싸웠고, 또한 싸워서 이겼다.
보라 우리 모두 손잡고 외치던 의거의 거리에 우뚝 솟은 마산의 얼을 이 고장 3월에 빗발친 자유와 민권의 존엄이 여기 영글었도다.
1962년 7월 10일
마산 3·15의거 기념사업 촉성회

<사건적 배경>
◦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의 반 이승만․자유당 시위가 발생
◦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일에 마산에서 학생 및 시민들과 민주당이 주도한 시위 발생(제1차 마산의거)
- 오후 2시 30분경 시작된 이날 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시민들은 파출소를 비롯해 관공서를 공격했음. 
◦ 1960년 4월 11일 마산시 신포동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김주열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제2차 마산의거(4. 11-13) 발발
- 4월 11일 시민들은 도립병원에 경찰이 안치한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며 경찰서를 포위하는 등 시위를 벌임
- 4월 12일 마산고교, 마산상고, 마산공고 등의 학생 3,000여 명과 시민 1만 여명이 시내 일원에서 시위를 갖고, 도립마산병원에 집결 해산. 당일 밤에는 1만여 명이 마산경찰서 앞에 집결 시위 해산
- 4월 13일 해인대학(현 경남대학) 학생 200여 명이 시내 일원에서 시위. 당일 밤 김주열의 사체는 고향 남원으로 이송
◦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주도한 도심 시위 발생
◦ 1960년 4월 19일 서울대를 비롯해 서울지역 대학, 고등학교, 중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 발생
◦ 자유당은 장면타도, 이기붕 당선을 위해 관권, 금권, 폭력, 매수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부정투표, 환표 부정, 부정개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을 실시하여 승리했으나, 결국은 정권의 몰락으로 귀결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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