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청 을지로별관(옛 미문화원, 현 그레뱅 미술관)

서울시청 을지로 별관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미쓰이물산 경성지점으로 건축되었다. 광복 후에는 1948년에 채결한 ‘한·미 간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 협정’에 따라 미국 행정부 소유가 되었으며, 이후 1990년까지 미국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 1990년에 소유권이 서울특별시로 넘어 오면서 2013년까지 서울시청 을지로 별관으로 사용되었으며, 건물의 역사적,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3월 2일 등록문화재 제238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시와 프랑스 CDA사와의 업무협약에 따라 을지로 별관은 리모델링 후 2015년 7월 29일 밀랍 인형 전문 박물관인 그레뱅 뮤지엄으로 개관하였다.


 
                       창문에 "광주학샐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사죄하라"는 글귀가 적힌 종이가 붙여진 미문화원(1985.05.24)

이 건물은 1937년 9월에 착공되어 1938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지하 1층, 지상 4층의 규모이다. 이 건물은 본래 미쯔이물산(三井物産)주식회사 경성지점 사옥으로 쓰던 건물이었지만 4.19당시에는 미국대사관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다. 미국대사관이 세종로로 옮겨가자 미국문화원 건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 반미운동의 ‘대중화‘를 가져왔던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 영향을 많이 끼친 농성사건인 1985년 5월 23일 ‘미문화원점거농성‘이 일어난 민주화운동 유적이기도 하다. 그 뒤 이 건물은 서울시종합자료관으로 사용되다 최근에 서울시청이 재건축에 들어가면서 서울시청을지로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60년 4월 26일 10시 30분 경무대로 향하기 전에 매카나기 대사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출발했다. 그 성명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 대사관은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미국대사관은 이 나라의 갈구를 깊은 관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다. 대사관은 서울과 기타 도시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한국민 측에서도 질서유지를 위하여 당국을 지지할 책무가 있다. 또한 당국도 국민의 감정을 이해하고 정당한 불만에 대처하기 위한 진정한 해결안을 마련할뿐더러 미봉책을 취할 시기가 아니다.”여기서 ‘미봉책을 취할 시기가 아니다‘란 말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뜻한다. 


1) 관련 민주화운동 개요

○ 1980년대 사회운동, 특히 학생운동의 특징은 반미자주화 운동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30여 년이 넘게 ‘반미의 무풍지대‘로 알려져 온 한국에서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면서 미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기 시작하여 1980년대 중반부터는 본격적인 반미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 미국에 대한 한국의 인식을 변화시킨 것은 5․18 광주민중항쟁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이 진행중인 1980년 5월 22일 한미연합사령관인 위컴은 “미국은 광주사태를 진압하는 데 사용할 목적으로 4개 대대의 한국군을 미국의 통제하에서 풀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에 동의했다”고 발표, 5월 23일 “카터 행정부는 한국에서 안보와 질서의 회복을 지원하기로 하는 한편 정치적 자유화에 대한 압력을 늦추기로 했다”는 미 국무부 대변인의 발표를 통해서 미국의 입장이 드러났다. 이러한 일련의 미국의 발언들은 광주민중항쟁을 겪은 한국민중들의 분노를 사기에 이르렀고, 자연스레 미국에 대한 인식의 전환으로 이어졌으며, 그것이 직접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반미자주화운동이었다. 

2) 반미운동의 시발 : 광주와 부산에서의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 광주민중항쟁 당시 미국의 역할에 대해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광주민중항쟁을 직접 겪은 광주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자연스레 미국에 대한 인식전환과 분노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직접적으로 표출된 사건이 1980년, 미 국무장관 브라운의 방한 즈음인 12월 9일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이었다.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광주지부장이었던 정순철(당시 27세)이 농민회원인 김동혁, 박시영, 윤종형, 임종수와 함께 문화원 지붕에 구멍을 뚫고 사무실에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지른 사건이었다. 

○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에서 또 다른 방화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날 오후 2시에 부산의 미문화원이 학생들의 손에 의해 불타고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제목의 성명서가 시내 곳곳에 뿌려졌다. 성명서에는 “이제 우리 민족의 장래는 우리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땅에 판치는 미국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 먼저 미국 문화의 상징인 부산 미문화원을 불태움으로써 반미투쟁의 횃불을 들어 부산시민의 자각을 호소한다”고 방화에 나선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전두환 정권은 이를 곧바로 반미․좌경용공으로 몰아붙였고 전국의 치안력을 총동원하여 범인 검거에 나섰다. 3월 30일, 사건에 가담했던 최인순, 이미옥, 김화식, 최충언, 박원식 등 5명의 학생이 체포되고 4월 1일에는 사건의 주모자인 문부식, 김은숙이 원주교구청 최기식 신부의 주선으로 자수하였다. 이튿날 김현장이 자수함으로써 이 사건은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전두환 정권은 신부로서의 양심에 따라 보호를 요청해 온 문부식 등을 설득하여 자수를 주선한 최기식 신부, 김영애 등을 구속함으로써 사건을 확대시켰다. 결국 이 사건으로 총 22명이 구속되고 최고 사형에서 최하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 언도되었다. 

3)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 부산 미문화원 사건 이후 반미의 문제가 전국의 학생운동권에 확산되면서 반미자주화 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당시는 아직 맹아적 단계이기는 하나 이전 시기의 감정적, 정서적 반미운동의 차원에서 한 걸음 진전하여 보다 과학적인 인식으로서의 반제, 즉 반미운동에 접근하게 된다. 학생들은 1980년대 미국의 대한전략을 동시다발 세계전략에 기초하여 남북한 교차승인을 통한 분단의 영구화와 한-미-일 삼각안보체제의 구축 등을 내용으로 하는 대소전진기지의 강화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정세 인식에 기초하여 1983년 11월 13일로 예정된 레이건 방한에 대한 반대투쟁이 전개되었다. 10월부터 각 대학의 시위와 민주단체들의 성명 등이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서울대 교내 시위를 주도하던 황정하가 경찰의 과잉저지로 추락사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 1985년 2․12 총선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의지가 표출되고, 이에 힘입은 학생운동 세력은 4월 17일 고려대에서 ‘전국학생총연합‘을 구성, 그 산하에 민족․민중․민주를 이념으로 하는 각 대학 내의 투쟁 조직들을 결집하여 ‘삼민투‘를 결성했다. 1985년 4월에는 전두환의 방미를 반대하는 광범위한 투쟁이 벌어졌다. 4월 10일 경인지역학생연합과 그 산하에 반외세민족자주수호투쟁학생연합이 결성되었다. 이 단체들은 정권의 반민족성과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책의 본질을 국민에게 폭로하는데 주력하였다.

                                                                                                    
- [85.523]미문화원 점거농성 -
(사이버경찰청 사진인용)
“미국은 광주학살 책임져라”란 구호가 보인다. 

○ 전국적인 학생조직의 건설과 더불어 학생운동 세력은 5월 들어 ‘광주학살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단투쟁‘을 전개하였고, 이 투쟁의 연장선에서 1985년 5월 23일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이 일어났다. 5월 23일 12시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의 삼민투 소속 학생 73명이 일시에 미문화원 2층 도서관을 점거한 것이다. 미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은 ‘우리는 왜 미문화원에 들어가야만 했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광주민중항쟁 당시 미국이 미군 지휘하의 4개 대대를 광주 진압을 목적으로 풀어주어 신군부를 지원한 것에 대한 해명과 공개사과, 그리고 이후 군사독재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워커 주한 미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농성장에는 미국 측의 ‘선 농성해제, 후 대화‘의 입장과 학생측의 ‘공식문서화와 학살동조 책임 인정 및 공개사과‘ 요구가 팽팽히 맞서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72시간의 농성과정에서 “미국 측의 미온적인 태도에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5월 27일에 있을 남북 적십자회담을 고려하여 농성을 풀기로 하고…, 농성해제가 문제의 해결이 아닌 보다 효과적인 싸움을 위한 재출발”임을 밝히고 5월 26일 평화적으로 농성을 풀었다. 이 후 함운경 등 25명의 학생이 구속되고, 43명 구류, 5명 훈방으로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 한편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전학련과 삼민투를 좌경용공으로 매도하다가 나중에는 폭력 사대주의로 규정하였다. 또한 5월 27일에 있을 남북 적십자회담을 겨냥하여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행위라는 식으로 국민의식에 깊이 뿌리 박힌 반공 이데올로기를 자극, 위기의식을 조장하여 문제의 확산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비해 미국은 이 사건을 통해, 한국에서 가시화된 반미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 역점을 두고 광주항쟁에 대한 책임을 전두환 정권에 전가하기에 급급했다. 

○ 당시 학생들은 반미를 좌경용공으로 매도하는 정권의 시도에 대해 ‘반미는 아니다‘는 수세적 입장을 취했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됨으로써 전국민과 세계 여론의 관심을 크게 끌었으며, 이로 인해 미국이 한국민의 영원한 우방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광범위하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이 사건은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사에서 ‘민족의 자존을 일깨운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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