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의 도화선, 남영동 대공분실 1월 14일 오전 11시 20분, 박종철 군은 끌려온 지 3시간여 만에 물고문을 당하다 사망한다. 일고여덟 명의 수사관들이 초조해하며 기다리던 509호실에 의사 오연상과 간호사가 불려가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그를 되살릴 길은 없다. 그날 저녁, 대공수사단은 최환 서울지검 공안부 부장검사에게 쇼크사로 처리하고 화장하겠다고 했으나, 그는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부검하라고 지시한다. 다음날 저녁, 중앙일보 석간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검찰 간부실을 돌다 우연히 엿듣게 된 말 한 마디를 놓치지 않고 예리한 촉각으로 취재에 나선 신선호 기자의 기사다. 어둠 속에 영영 묻혀버렸을 수도 있는 한 젊은이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황적준 박사와 박동호 교수 그리고 박종철 군의 삼촌인 박월길 씨의 입회 아래 시신 부검이 이뤄진다. 부검의 황적준 박사는 경찰 측으로부터 부검 감정서를 심장마비로 작성하라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라는 의견을 끝까지 고수한다. 16일 오전,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심문 도중 갑자기 ‘억’하고 죽었다는 허위 발표를 한다. 비슷한 시각, 벽제에서 화장된 박종철 군의 유골은 임진강에 뿌려진다. 그리고 같은 날짜 동아일보에는 박동호 교수와 박월길 씨의 증언이, 다음날에는 의사 오연상의 증언이 실린다. 진상을 목격한 이들의 용기 있는 증언을 통해 박종철 군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된다. 독재정권에 대한 반감과 저항이 들끓기 시작한다. |
이렇듯 고문 추방과 민주화를 위한 시위가 거듭되고 있었으나, 정권의 대답은 오만불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개헌 요구를 묵살하고 역시나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호헌 선언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4·13호헌 발표는 엄청난 역풍을 맞기 시작한다. 계층과 직업을 망라한 각계 단체에서 호헌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무기한 단식기도에 들어간다. 그럼에도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성명과 선언만으로 투쟁의 열기를 증폭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자 감옥으로부터 세 통의 편지가 구세주처럼 날아들었다. 5월 18일, 김승훈 신부가 낭독한 성명, 바로 그것의 토대를 이루는 내용이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영등포교도소
사건의 진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감옥에서 밝혀지게 된다. 이부영 씨는 그 당시에 1986년 5·3인천 사건으로 구속되어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고문치사 사건의 주범으로 구속된 경찰관 두 명 역시 같은 사옥에 수감되었다. 교도관들을 통해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전부터 친분이 있던 보안과 간부가 당직날 밤에 그를 불러내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에 박종철과 관련한 이야기까지 하기에 이른다.
수감중이던 이부영 씨의 메모가 밖으로 알려지는 역할을 했던 한재동 교도관.
그는 지난달 18일(금) 명동성당에서 열린 6월항쟁 기념미사에서 민주시민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알게 된 사건의 진상은 편지 세 통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한재동 교도관에게 전해진다. 두 사람은 이부영 씨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될 때부터 수감자와 교도관이라는 신분으로 처음 만나 지속적인 친분을 쌓아오던 사이였다. 2004년 퇴직 이후 서울경마장 내 테니스장 관리를 맡고 있는 한재동(60세) 씨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부영 씨가 그런 얘기를 머릿속에 담아뒀다가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하더니, 이튿날 편지를 써서 주는 거예요. 그걸 김정남 씨한테 전하라면서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겁나는 건 없었어요. 다만 불심검문 같은 거라도 걸려서 밖으로 알려지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죠.”
당시 김정남은 이부영의 수배를 도왔다는 이유로 역시 수배를 당하고 있던 터라 그는 함께 교도관 생활을 했던 전병용 씨에게 편지를 전했고, 이 편지는 3월 중순에 이르러서야 김정남에게 전해진다. 서울구치소에서 근무할 때 간부들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다 사표를 내게 된 전병용 씨는 5·3인천 사건 당시 그의 차에 이부영, 장기표, 김정남을 태우고 인천에 갔다 왔다는 이유로 역시 수배를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정남에게 편지를 전해준 바로 며칠 뒤에 잡혔다가 집행유예를 받는다.
김승훈 신부의 발표가 있은 뒤, 한재동 씨는 “내가 중간 역할을 잘 했구나.”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김정남 씨의 책을 통해 20년 만에 이름이 밝혀진 그는 올해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6월항쟁 기념미사에서 민주시민 감사패를 받았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이마며 콧등이며 광대뼈가 강골 이미지의 전형이라 할 만한 그는 인터뷰 내내 무심한 듯 덤덤한 듯 이야기를 풀어놓았고, 축하 인사에도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받으라 하니까 받긴 하는데, 한 평생 공무원 생활하면서 벌만 받다가 이제 퇴직하고 나니 상을 준다니까 고맙긴 하지만, 죽은 사람도 있는데, 뭐. 많은 사람이 죽었잖아요.” 1987년에도 그랬고, 교도관 생활을 하면서도 쉬는 날이면 이면 늘 시위 현장에 참석한 그였다. 그에게도 2007년 오늘은 민주화 과정에서 산화해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 빚을 여전히 갚지 못한 사회였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의문사에 검사와 기자와 의사 등의 의인이 고문 사실을 입증해주었다면, 영등포교도소에서 밝혀진 사건의 진상은 이부영 씨의 역할도 컸을 뿐 아니라 두 의로운 교도관들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김정남 씨는 그간의 관련 자료를 모으고 이부영 씨의 편지를 종합해 문건을 만들어나갔다. 처음에는 야당 의원을 통해 발표하려고 계획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사제단에 그 역할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관련 문건과 편지를 함세웅(65,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신부에게 전달해 준 이는 고영구 변호사의 부인과 딸이었다. 시국이 시국이었던 만큼 사제단은 발표 시기를 두고 고심을 거듭했고, 황인철, 홍성우 변호사가 김정남 씨가 작성한 초안을 검토하고 다듬었다.
그리고 5월 18일, 김승훈 신부에 의해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성명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명동성당
그 이틀 뒤,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하기 시작한다. 궁지에 몰린 정권은 전면 개각을 단행하지만, 국민들이 원한 것은 허울 좋은 제스처가 아니라 정권의 퇴진이었다. 바야흐로 6월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6월 10일 오후 6시가 되자 서울 곳곳은 애국가와 차량의 경적 소리에 파묻혔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차도로 뛰어들어 시위대에 합류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인파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전국에서 50여만 명이 참가했고, 연행자만 3천 8백여 명이었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 최루탄에 맞서 싸우던 시위대는 밤이 되자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쫓길 경우 명동성당으로 집결한다는 계획이 있긴 했으나,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1천 명에 가까운 엄청난 인원이었다. 5일 동안의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다.
명동성당 농성투쟁은 국민들에게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으며, 대다수 국민들이 민주화를 열망하고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공고한 연대의식을 갖기에 충분했다. 이렇듯 6월항쟁의 기폭제로 작용한 농성투쟁 이후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까지 전국적으로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시위가 매일같이 일어났다. 그리고 노태우의 6·29선언이 발표된다. 그 외형은 국민들에게 항복을 선언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전두환의 계산된 작품이었고 ‘속이구’ 선언에 불과했다.
그 얼마 후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 군이 사망했으며, 1990년대까지 완전히 종식시키지 못한 독재정권의 생명력을 상징하듯 최루탄은 여전히 거리를 뒤덮었다.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열매가 여전히 고루 분배되지 못한 채 20년이 지나가고 있다.
글 · 류외향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1966년 대구 매일신문으로 등단,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가 있다.
사진 · 황석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