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서대문형무소 전경

서대문구치소에서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구 지하감옥이 발굴된 모습 _ 경향신문(1991)

1907년의 제3차 한일협약에서 일본은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빼앗아 버렸다. 이후 대한제국 정부의 감옥은 통감부의 감독 아래 들어간다. 서대문의 감옥은 인왕산 기슭의 금계동(金鷄洞 : 영천<靈泉>)에 일본인 사천왕수마(四天王數馬 : 시텐노 가즈마)가 고안‧설계하고, 5만 엔의 공사비로 1907년에 준공했다. 옥사와 부속 건물로 면적 480평, 수용인원 500여 명으로, 당시는 경성감옥으로부터 기결수를 이감했다. 1908년에는 경성감옥으로 개칭하고, 1912년에는 경성감옥을 공덕리에 신축했기 때문에 영천의 감옥을 서대문감옥으로 개칭했다. 3.1운동 때에는 검거자가 급증하면서, 서대문감옥에는 독립선언서의 첫 번째 서명자 손병희 등 30여 명이 미결수 3000여 명과 함께 수감되었다. 만 15세의 여학생 유관순이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일제는 1923년‘감옥‘을‘형무소‘로 개칭하고, 18세 미만의 여성 수형자는 서대문형무소로, 무기와 10년 이상의 남성 수형자는 경성형무소와 대전형무소로 수용하였다. 해방 후 1945년 10월 13일 미군정은 경성형무소를 서대문형무소로 합쳤다.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로, 1986년에는 서울구치소로 개칭되었다. 서울구치소는 1987년 경기도 시흥군 의왕읍(당시)로 이사해 갔다. 서울구치소가 이사해 가자 서울시는 법무부로부터 이를 매입. 85억 원의 예산을 들여 1988년 12월부터 조성공사를 시작, 1992년 8월 15일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개원했다. 1992년 4월 15일에 착공하여 7월 27일에 완공한 유관순 열사 지하옥사 보호각은 한눈에 봐도 왜색이 짙은 건물이다. 왜 하필이면 유관순 열사 지하옥사 위를 덮은 건물을 이렇게 지은 것일까? 노태우 군사정권의 말기 작품으로 정말 생각이 없는 작품이다. 일제하 독립운동과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유적인 서대문형무소는 군사독재정권 후예들이 공원화사업의 주도권으로 쥐고 추진함으로써 1970년대, 80년대 민주화 흔적은 하나도 남기지 않는 역사 말살의 현장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행히 작년 당선된 문석진 구청장이 서대문 역사공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서대문 역사공원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줄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만해 한용운이 3.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지은 시를 읽어보면서 독립투사들의 수형생활의 신고를 조금이나마 느껴보는 것도 서대문형무소를 찾는 이의 발걸음을 의미 깊게 하리라 생각된다. 한 겨울 불기 하나 없는 감옥이 얼마나 추웠으면‘이불 차기는 쇠붙이‘라고 표현했을까? 너무 추워서 깬 새벽 만해의 귀에는 어디서 절집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오고 있었다. 철창은 왜 종소리는 막지 못하는가 하면서 감옥에 갇힌 자신의 몸과 종소리의 자유를 대비시키고 있다. 종소리의 ‘자유‘는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자유일 것이다.




서대문형무소는 근대적 시설을 갖춘 한국 최초의 감옥으로 독립 이후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1988년부터 지금의 역사관으로 이름과 함께 그 용도가 바뀌었다.

방문인증 갤러리

분필을 든 시민들
39521895_210632226477462_7741226960998629376_n.jpg
2018-08-21
또바기
또바기-9(서대문역사관).jpg
2017-08-30
역사병아리
역사병아리-1(서대문).jpg
2017-08-16
씨앗
씨앗-16(서대문).jpg
2017-08-16
민주필름1980
민주필름1980 12(서대문형무소).jpg
2016-09-13
그래 가자
그래가자17(서대문형무소).jpg
2016-08-8
춘천지역 대학생 시대를 걷다
시대를 걷다1(서대문형무소).jpg
2016-07-26
과거와 현재, 맞팔
과거와 현재 맞팔13(서대문 형무소).jpg
2016-07-19
숨은민주찾기
숨은민주찾기(서대문형무소2).jpg
2015-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