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08년  발행한 <그날 그들은 그곳에서>-다시 가본 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단행본에 실렸던 글입니다. 





 


대구역에서 영남대 병원 방향으로 쭉 뻗은 길을 가다 보면 반월당이 나온다. 반월당은 6월 항쟁 당시 시민과 학생들의 주요 거점이었다. 그 곳을 지나면 명덕로와 중앙대로가 교차하는 명덕 네거리에 닿는다. 원래 명덕 로터리라 불렀으나 교차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2·28기념탑이 1990년 두류공원으로 옮겨간 뒤 명덕 네거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2·28 대구학생운동은 4·19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1960년 2월 27일 대구에서는 자유당의 대구 유세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28일에는 민주당의 유세가 예정되어 있었다. 민주당 유세에 학생들이 참여할 것을 우려한 자유당 측은 각급 학교에 일요 등교령을 내린다. 당시 대구지역 학교들이 일요일 등교 명분으로 삼은 핑계도 가지가지다. 다음 달로 예정되어 있던 시험을 갑작스레 앞당긴 곳도 있고 토끼사냥을 핑계로 삼은 곳도 있었다. 
학생들이 갑작스런 시험 일정 변경에 항의하자 “그럼 영화감상이나 할까?”라고 하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이는 일요일에 학생들을 학교에 묶어두려는 의도를 고스란히 내비친 말이었다. 자유당 측 인사가 대구를 방문할 때는 환영행사에 강제로 학생들을 동원하는 등 학교와 자유당의 부당한 행태 때문에 불만이 쌓여 있는 대구의 학생들이었다.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 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상고 등 대구의 학생들은 2월 28일 학교에 등교하였다가 “학생을 정치의 도구로 악용하지 말라”,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우리에게 인류애를 발휘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달려 나왔다. 이미 전날 경북고와 대구고 학생들은 반월당에서 합류할 것을 약속해 두었다. 반월당에서 합류한 학생들은 경북도청과 자유당사, 시청 앞 광장, 대구역 광장 등을 돌아다니며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 당했으며, 그 중 일부는 수성 천변에서 열리고 있는 민주당 유세에 참여하기도 했다.
2·28 학생운동은 독재정권의 타도와 같은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된 운동은 아니다. 허나 결과적으로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의 학생들이 반독재운동에 나서게 되었으며, 이어지는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와 4·19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씨와 함께 대구백화점 앞에 도착했을 때에도 대구 여성회에서 주최하는 여성유권자 투표독려 문화행사가 한창 준비 중이었다. 조금 뒤 행사 준비가 끝나자 노래패와 율동패가 어우러져 흥겨운 문화마당이 펼쳐졌다. 시민들은 지나치던 발걸음을 잠시 멈춰 구경을 하기도 하고 아예 돌의자에 눌러앉아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햇살이 강렬하다는 걸 빼곤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이 활기찬 풍경이었다. 고통과 절망처럼 어두운 낱말들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대구는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고달픈 여정을 걸어왔다.
해방 정국에서만 하더라도 대구의 별명은 ‘야당도시’였다. 10월 항쟁을 비롯해 2·28 대구학생운동을 보더라도 대구 시민들의 민주에 대한 열망은 다른 도시 못지않게 뜨거웠다. 마치 무더운 기후를 견디는 사람들답게 억세고 기운도 셌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들어 선 뒤로 대구에는 관제데모만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화운동이란 찬밥 신세가 아닐 수 없었다. 
해방 정국에서만 하더라도 대구의 별명은 ‘야당도시’였다. 10월 항쟁을 비롯해 2·28 대구학생운동을 보더라도 대구 시민들의 민주에 대한 열망은 다른 도시 못지않게 뜨거웠다. 마치 무더운 기후를 견디는 사람들답게 억세고 기운도 셌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들어 선 뒤로 대구에는 관제데모만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화운동이란 찬밥 신세가 아닐 수 없었다. 
한일극장을 기준으로 동성로와 반대편에 있는 중앙로를 건너면, 아직도 이런 곳이 있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재래시장을 만날 수 있다. 염매시장이라 불리는 시장의 골목을 지나 끝에서 왼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일명 곡주사(哭呪士)라 알려진 성주식당을 찾을 수 있다. 이곳이 곡주사라 불리게 된 이유는 이 술집을 찾는 사람들이 “유신을 저주하는 선비들이 모인 곳”이라 자처했기 때문이다.
유신체제 말기에 대구지역 대학생들도 단일한 조직을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계명대, 영남대, 경북대 학생들이 연합하여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경북학생협의회’라는 단체를 조직한다. 1979년 9월 4일 계명대 학생들은 빌라도광장에서, 영남대 학생들은 도서관 앞에서, 경북대 학생들은 시계탑 주변에서 일제히 이 단체의 설립을 선포하고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유신헌법 철폐 등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으며 이로 인해 경북대, 영남대가 휴교에 들어가고 계명대는 10월 24일 2천여 명의 학생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시킨다.





시내 전체가 민주화운동의 성역

곡주사는 마치 대구의 민주화운동과 궤적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곡주사로 통하는 좁은 골목 옆으로는 수십 층이 넘는 삼성금융플라자 빌딩이 서 있다. 그 탓에 곡주사는 늘 어둑신하다. 도시의 변두리도 아닌 중심가에 이처럼 그늘진 곳이 있다는 건, 마치 대구에서 민주화운동이 늘 그늘 아래 있었던 것을 연상시킨다. 그래서일까. 여느 술집과 다르게 그 곳에는 울분과 분노, 상처와 아픔이 짙게 배어 있는 듯 했다. 
70년대 후반 처음 문을 연 뒤로 유신시절의 대학생들, 대구지역 민주인사들과 함께 살다시피 한 곡주사의 정옥순(71) 할머니는 이왕 온 김에 들고 가라며 찌짐과 막걸리를 내주었다. 대구의 대학생들이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경북학생협의회’의 결성을 모의한 장소 역시 바로 이 곳 곡주사였다. 
80년대와 90년대에는 근처의 반월당에서 집회를 마친 사람들이, 요즘 들어서는 대구백화점 앞에서 촛불시위를 마친 사람들이 꼭 빼먹지 않고 들르는 곳이다. 

대구 사람들이 찌짐이라 부르는 파전에 텁텁한 막걸리를 걸치고 나오니 해가 설핏 기우는 듯 하다. 염매시장 근처에는 씨네 아시아가 있다. 그 곳은 원래 아세아극장이었는데, 직선제 개헌추진대회가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극장에서 그런 대회가 열렸다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그러고 보니 대구 시내 전체가 민주화운동의 성역쯤으로 여겨졌다. 곡주사를 중심으로 보면 바로 옆의 중앙로를 비롯해, 반월당 그리고 명덕 네거리 또한 한일로와 동성로 모두가 몇 걸음 안에 있다. 대구 시민들이 민주화를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내딛던 거리가 바로 대구의 중심가 그 곳에 있었다. 
술기운 탓이려나.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유신시절 자신의 집을 찾던 학생들이 보약을 만들어 가지고 지금도 찾아온다며 헐겁게 웃던 곡주사의 할머니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여전히 이 도시의 한 귀퉁이에 찌짐과 막걸리를 파는 술집이 있는 한, 무언가를 비판하고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양심들이 찾아들 그늘은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대구의 거리가 지워지며 과거의 풍경들이 한꺼번에 솟아났다. 


 


4·19를 거쳐, 군정연장 반대 시위의 물결이 지나갔고, 그 뒤를 따라 유신반대 시위의 물결이, 6월 항쟁의 함성이, 노태우정권 퇴진 국민대회의 깃발이 차례차례 지나갔다. 이제서 조금 알 것도 같다. 대구가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게 여겨졌던 건, 어느 때건 대구 시민들 역시 민주화의 길에 동참하리라는 믿음과 증거가 구석구석에 숨 쉬고 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오래 된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유령처럼 달구벌을 거닐어 보고서야 그 곳을 조금 알 수 있게 된 듯한 기분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동학교주 최제우가 처형당한 자리라는 중앙공원 위쪽으로 석양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글 손 홍 규

 

1975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최명희 청년 문학상 소설 수상

<작가세계>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바람 속에 눕다>, <사람의 신화>, <폭우로 걸어 들어가다>

<아이는 가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다> 등 발표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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