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교회의 역사는 1973년, 이 땅이 오랜 시간 군부 독재에 얼어가고 민중이 가난과 폭압으로 병들어갈 때, 한국특수지역선교위원회(위원장 박형규 목사)가 성남 지역의 빈민 선교를 위해 젊은 전도사 이해학을 파송하면서 시작되었다. |
고난의 길 위에서 민주의 횃불을 들다
1973년은 유신정국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한 가운데 김대중 납치사건과 서울대 최종길 교수 의문사사건이 일어나고 전국 각 대학 동맹휴학, 함석헌과 홍남순 등 15인이 참여한 ‘11·5 지식인 시국선언’,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이 주도한 ‘유신헌법개정 백만인 서명운동’이 전개된 시기였다. 그래서 잠시나마 민주화의 봄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가 바뀌자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을 부정·반대·왜곡·비방하는 일체의 행위 및 헌법 개폐를 주장·발의·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의 긴급조치 1·2호(1974.1.8)를 선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민교회의 이해학은 더 이상 선교활동을 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권호경 목사를 비롯한 김동완, 허병섭, 인명진, 이규상, 박창빈 등과 긴급조치에 저항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개헌청원서명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체포되어 동대문 경찰서로 연행되었다가 곧바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주민교회의 이해학 전도사는 이때(1974.1.17) 긴급조치 1·2호 위반으로 1·2심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일년여 뒤, 이해학이 형 집행정지로 감옥을 나왔을 때는 교회가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세 들었던 건물에서 쫓겨나 있었다. 하지만 주민교회는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노회의 도움을 받아 새 터를 마련하고 교회 안에 해고노동자를 위한 상담소와 야간학교 그리고 공공 구판사업과 의료협동 공동체와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병든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이 치료받을 수 있게 했다
영원한 노동자 김종태 열사
한 시퍼런 젊은이가 1980년 6월 9일 신촌 이대 앞 네거리에서 자기 몸에 불을 붙이고 훨훨 타서 숨져갔다. 1958년 부산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남의 집 고용살이로 떠돌며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야간학교를 다니던 어린 노동자. 먹고사는 문제로 장기결석을 해야만 했던, 그러나 야간학교(성남제일실업중학)가 생긴 이래 최초의 검정고시 합격자가 된 그. 하지만 끝내 이 땅에서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포함한 민주인사 석방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를 외치며 쓰러져간 그, 김종태! 그는 성남주민교회의 청년 회원이었다.
1960년대 초부터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소외당하고 정치적으로 억눌리던 수많은 도시 빈민, 철거민, 노동자들이 정부의 졸속적인 이주저액에 쫓겨 와 만들어진 도시 성남, 그 과정에 주민교회가 함께 있었다. |
“그는 너무도 깨끗한 청년이었습니다. 무자비한 군사독재 권력에 저항한 광주의 아픔(1980년 5월 민주항쟁)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인식하고 자기 몸에 불을 살랐어요. 유서가 있었어요. 광주 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 남긴 글과 나에게 남긴 유서 그리고 성명서와 시편입니다. 대학생들도 놀라워할 정도의 명문입니다. 참 아까운 나이에 스러져갔습니다. 지금도 그때가 되면 광주묘역을 참배하고 추모제를 엽니다. 김종태 열사 추모제가 우리 교회와 성남시의 또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이해학 목사가 그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결국 그러한 저항과 은혜가 전환점이 되어 1987년 민주항쟁으로 이어지고 오늘 우리 교회가 이웃과 함께 생활공동체,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고 민족이 하나 되는 통일공동체를 위해 믿음의 행진을 계속 이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해학 목사는 이 땅에서 또 다른 노동자 김종태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때까지 주민교회는 약한 자와 억눌린 자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전파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우리 민족뿐 아니라, 이 땅에서 함께 사는 여러 민족 이주노동자의 고단한 삶 위에도 똑같이 해당된다고 했다. 겨울 한낮 밖은, 성남 주민교회의 낮은 첨탑 위로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